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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안 Nov 05. 2024

소심한 내향형 치과의사의 차트 사용법

파란색 한 줄 메모의 비밀

"농사 때문에 11월은 되어야 올 수 있을 거 같은데요."

"저 당분간 딸네 애들 봐주러 가야 되어 바쁘네요."

"직업이 용접하는 일이라 치과 윙 거리는 소리가 더 잘 들리고 힘드네요."

"아기가 이제 갓 100일이 되었어요."

"곧 수능이라 빨리 마무리하고 싶어요."


 진료의 시작은 증상이 아닌 일상이다. 때로 안타깝고, 한편 덩달아 행복해지는 일상의 이유를 들고 병원을 찾아온 환자들, 진료의 시작도 마무리도 증상이 아닌 일상일 때가 훨씬 더 많다.

 그들이 조심스레 꺼내놓는 건 새까만 충치도, 위태한 잇몸도, 흔들리는 송곳니도 아닌 바로 오늘까지 이어져온 그 사람의 삶이었다. 그 삶이 오롯이 새겨진 치아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어떤 하루를 보내다 결국 이곳 치과를 찾아왔을지 보이는 듯하다.


 이럴 땐 대문자 'I' 내향형 인간인 나의 타고난 성정이 못내 아쉽다.

 통증을 호소하고, 증상을 궁금해하고, 일상을 꺼내놓는 그들의 마음에 조금 더 적극적인 맞장구 한번 제대로 쳐주지 못하는 사람인 게 미안하다. 귀찮은 것도 바쁜 것도 아닌, 내게 어색한 일이라는 것, 참 많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진료하는 그 짧은 시간 동안 환자와의 메시 급 티키타카 대화 드리블을 꿈꾸지만 번번이 입도 떼지 못하고 머릿속에서 이불킥만 해대기 일쑤다 

 그뿐인가, 눈을 마주치는 게 어색해서 소공포를 적극 활용하고,  x-ray 사진을 전방 주시하며 쇼 미 더 머니 저리 갈 정도의 속사포로 치료 주의사항을 설명하니 재빠른 리액션이 가당키나 할까어쩔 수 없네, 끄덕이며 들어주는 의사라도 되어야지.



‘마늘 농사 때문에 11월 이후 올 수 있음.’

‘딸네 서울에 왔다 갔다 해서 약속 변경 있음’

‘출산한 지 약 100일 정도 지남’

‘바닥 건축 자재 관련 직업임’


 치료와 크게 관련은 없어 보이지만

차트를 펼쳤을 때 조금이나마 말을 붙여보려고 파란색으로 메모 한  적어 본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익히 들어본 김춘수 시인의 시처럼


 다음에 오셨을 때는 “농사는 잘 마무리되셨어요?” 메모에 있던 일상 한마디 건네며 시작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위잉 시끄럽게 돌아가는 핸드피스 소리와 코끝을 스치는 알코올 냄새 사이로 환자분들의 긴장한 몸과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해질 수 있다면.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나누는 어색한 인사말도 그리 부끄럽지 않을 것 같다.


 중구난방 동네 축구 급의 헛발질 대화라도 서먹한 공기를 데울 수 있게 해 달라 세상 모든 신들에게 기도하며, 짧은 파란색 메모를 소심하게 입력해 본다.


‘독감주사 시즌’ (다들 감기 조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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