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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안 Nov 19. 2024

파트라슈 여기 있슈

솔직하고 담담한 감정 표현의 기술

 토요일 저녁 10시. 친구와 오랜만에 저녁 먹으러 간다는 남편은 늦도록 소식이 없다. 오랜만에 콧바람 쐬는 거니까 하고 역지사지를 해보지만 좌로 우로 동분서주한 아이들과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지니 나도 모르게 서서히 열이 오른다. 친구의 칼로 물 베기 부부싸움 얘기를 실컷 들어주고 난 뒤 속상해하는 친구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 (그런 핑계로?) 진탕 마시고 온 남편.


  "결혼 생활이란 건 말이야. 많이 맞춰야 되는 거야. 네가 인마 많이 지고 살아야 되는 거야."


 친구한테 애 둘 가진 나름 결혼 선배로서 뼛속깊이 체득한 조언을 하고 왔다며, 나 정말 착한 남편인 것 같다고 의기양양하게 칭찬해 주기를 기다리는 파트라슈친구 사정도 알겠고 다 알겠는데, 주말 저녁에 술 먹는다고 내가 지금 애들 수발들고 네 수발까지..라는 말이 목까지 차오르다가, 안데르센의 동화 '당신이 하는 일은 언제나 옳아요'떠올랐다.


 한 농부와 그의 아내는 가난하지만 서로를 깊이 사랑하며 살아간다. 어느 날 농부는 말 한 마리를 데리고 시장에 나가서 교환을 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더 유용한 것을 얻기 위해 교환을 반복하는데, 결국엔 말이 닭으로, 닭이 썩은 사과로 바뀌는 등 가치가 점점 떨어지는 물건으로 바뀌게 된다.


 옆에서 지켜보던 두 신사는 농부가 집에 돌아갔을 때, 아내가 실망하거나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그의 선택을 칭찬할 것이라는 농부의 말을 믿지 않고, 아내에게 옳다고 인정받는다면 금화를 주기로 내기 약속을 한다. 결국 농부는 집으로 돌아가 아내에게 모든 이야기를 들려주고, 아내는 정말로 그의 모든 결정을 칭찬하며 진심으로 기뻐한다. 이렇게 농부는 내기에서 승리하고 금화를 얻게 된다.



 "당신이 많이 맞춰주지. 나 결혼 잘했지."

 인자한 농부의 아내로 빙의하여 목 안에 걸렸던 말 대신 좌뇌를 이용해 일단 입으로 출력해 본다. 랄랄라 랄랄라 랄라라랄라라랄랄라 썩은 사과 자루 대신 벌건 얼굴로 집에 들어온 남편은 플란다스 어딘가 울려 퍼질 것 같은 노래에 꼬리 흔드는 대형견처럼 너무 기뻐한다.


"평소에 음식 해줘, 쓰레기 버려줘, 애도 같이 봐줘 이렇게 많이 하는데도 나 당신 없는 짧은 고작 몇 시간 혼자 애 보는 게 힘들더라. 그게 참 우습다."


 내 감정을 숨기고 억지로 누군가를 띄워주는 말도 아니고, 원망 섞인 말보다 마음을 오롯이 바라보고 솔직하게 꺼내 놓으니 끙끙 힘들었던 마음이 탁 하고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힘든 감정을 저 멀리 부감샷으로 보는 것처럼, 바다에 파도치는 것 바라보듯, 어디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는 느낌에 왠지 모르게 몽글하고 이상하게 신기 아니 신비하게 여겨지는 순간이었다. 무의식적으로 억누르고 참으려 할수록 더 조여오던 무언가가, 솔직한 마음을 꺼내 보이는 순간 힘을 잃고 흩어지는 느낌. 감정은 나를 휘어잡고 끌고 다니는 것 같지만, 이렇게 한 발 물러서 바라보니 그것은 그저 잠시 머물다 가는 손님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여전히 대형 파트라슈와 미니미들의 사고치기와 꼬리흔들기는 계속된다. 집구석 네로 또한 '이놈들은 왜 안 자지. 아이고 뒷목이 너무 아프다.' 별의별 사건들로 뜨거워진 편도체에 데기 일쑤다. 수도 없이 많은 생각과 감정들이 어느 때고 흘러가지만, 아이들의 씰룩거리는 엉덩이춤을 보거나 함께 깔깔대며 웃는 모습을 볼 때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우리가 바라는 신비로운 기적이란 지금 이 순간에 있음을 다시 한번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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