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세량 Mar 31. 2019

계몽주의에 매몰된 리메이크 드라마

원작과 대중에 대한 제작진의 오만함.

일본 영화, 드라마는 한국의 정서와 잘 맞지 않다.


한국은 주로 무겁고 버라이어티 한 사건을 통해 이야기를 풀어가는 반면, 일본은 굉장히 정적이면서 캐릭터에 집중해 이야기를 풀어가는 편이다. 코미디 같은 경우야 나라마다 웃음의 포인트가 다르니 당연히 격차가 크다.


연기 스타일도 차이가 커서 일본은 만화적 과장이 심한 반면, 한국은 굉장히 현실적인 부분에 초점을 맞춘다. 물론 방영 시간이 다르다 보니 속도감이나 이야기의 깊이에서도 차이가 크다. 


그래서 양국의 드라마를 서로 리메이크했을 경우 큰 재미를 못 본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두 가지의 장단점이 묘하게 잘 섞여 일치했을 때는 예상외의 대작이 나오기도 한다. '하얀 거탑'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번에 방영된 '리갈하이'는 '하얀 거탑'이 되지 못했다. 


특히 리갈하이는 실패의 이유가 명확한 편이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 하나는 주제의 무리한 변화이고 다른 하나는 제작진의 지독한 계몽주의와 선민사상이다.



원작 리갈 하이가 말하고자 하는 것.



"우리는 신이 아닙니다. 인간은 어리석고 감정적이며 하찮은 생물입니다. 그런 인간을 대신하여 재판하는 것이 법입니다. 아무리 수상쩍고 의심스러워도 감정을 배제시키고 법과 증거에 의해 사람을 심판하는 것, 그것이 인류가 손에 넣은 법치국가라는 아주 귀중한 재산입니다."


원작 리갈하이의 대사 중 하나다. 이에 공감하든 하지 않든 이는 법치국가를 표방하고, 거기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심오한 대사다. 


이처럼 리갈하이는 가벼운 분위기를 지향하지만 꽤 무거운 주제를 다루는 드라마다. 그리고 끊임없이 시청자에게 질문을 던지는 드라마이기도 하다. 

후지 TV에서 방영한 원작 리갈하이의 포스터

"당신이 믿는 것이 과연 정의인가?" 

"법이란 것이 왜 필요한가?" 

"법과 정의가 상충할 때 우린 무엇을 중시해야 하는가?"


특히 '민의'와 '법'에 대해 논하는 장면은 한국에서도 회자됐을 만큼 매우 중요하고 생각할 거리가 많은 명장면이다. 그리고 주인공 코미카도는 공정함이 무엇인지, 부당한 상황에 법이 정한 테 도리 안에서 우리가 어떻게 맞설 수 있는지 자신만의 방식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그렇다고 이 드라마는 절대 답을 정해놓고 이것이 맞다 강요하지 않는다. 코미카도의 방식에 마유즈미는 늘 그게 맞는지 의심하며 질문하고 따진다.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되 답을 내놓거나 해석을 강요하지 않는 것. 이것이 이 드라마가 빛난 이유다.


'리갈하이'가 리메이크됐을 때 많은 이들은 이 주제가 살아있기를 원했다. 이는 이 드라마의 사상과 전달 방법이 옳으냐 그르냐를 떠나 현재 우리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리메이크는 이런 기대를 깔끔히 배신했다.


실망스러웠던 리메이크


리메이크 버전에서의 주제는 한 마디로 정리된다.


"정의는 돈이 아니라 진실로 사는 것이다."


이 한마디로 법의 모호함, 정의의 모호함을 주장하며 왜 돈이 가치 있는지, 설파하던 원작 코미카도의 논리는 산산이 부서졌다. 그리고 원작의 또 다른 주제가 깨졌다. 바로 정의란 보는 시간에 따라 다르며 진실이란 것도 어느 입장에 서느냐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모호함으로 인해 법이 필요하다는 것 말이다.


더 소름 돋는 점은 '사람이 100명이면 정의도 100개이다.'라고 외치며 저 대사를 말했다는 점이다. 원작에서 '사람은 무엇이 옳은지 판단할 수 없고 그렇기에 법을 만들었다'는 원작 코미카도의 주장을 완전히 뒤틀어 자기들의 답을 내려버린 거다. 

JTBC에서 리메이크한 리갈하이 포스터

거기다 의뢰인 비밀 유지 조약을 대놓고 무시하는 장면에선 소름이 돋았다. 만약 내가 변호사를 고용했는데 변호사가 자신의 정의와 맞지 않다고 나의 비밀을 법정에서 까발린다고 생각해보라. 과연 누가 변호사를 믿고 고용할 수 있겠는가? 


이는 원작의 주제를 대놓고 무시하며 "우리가 내놓은 답을 봐라! 원작보다 훌륭하지?"라고 외치는 수준이다. 그럼 도대체 왜 원작을 그 비싼 돈을 주고 사 왔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혹여 일본 드라마를 보고 "말도 안 돼. 우리가 진짜 정의가 뭔지 보여주지!"라고 생각한 건 아닌지 의문이다.


그랬다면 지독한 오만이고 기만이다.



미디어는 선생님이 아니다.


리메이크 판이 이렇게 된 이유는 제작진이 이미 자기들만의 답을 내려버리고 대중에게 이를 가르치려 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원작까지도 말이다.


이전에도 말한 적이 있는데 미디어는 선생님이 아니고 미디어를 소비하는 대중은 학생이 아니다.


물론 미디어에 연출자가 자신이 넣고 싶은 메시지를 넣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건 그저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에 그쳐야지 대중에게 가르치는 방식이 돼서는 안 된다. 대중은 바보가 아니다. 대중은 각자 어떤 사안을 알아서 판단할 충분한 경험과 지식을 가지고 있다. 


특히 원작이 있는 작품을 리메이크했을 경우, 어떤 메시지를 쑤셔 넣어더라도 원작의 큰 주제를 심하게 훼손해서는 안된다. 리메이크했다는 것은 원작의 팬도 끌어안겠다는 뜻이니 말이다.


하얀 거탑을 완벽한 권선징악으로 만들겠다고 장준혁을 주인공이 아닌 악역으로, 최도영을 선역으로 하여 최도영이 장준혁을 몰락시키고 정의를 실천했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끌어갔다면 그 드라마가 성공했을까? 근데 이 드라마가 딱 그것과 같다.

원작보다 훌륭하다는 평을 받으며 리마스터까지 된 하얀 거탑

결국 드라마 제작진이 페미인지 아닌지 이런 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드라마 제작진이 대중을 계몽시켜야 할 대상으로 보고 오만했다는 게 가장 문제다. 그것도 엄연히 원작이 있는 드라마를 사 와 멋대로 난도질해놓으면서 말이다. 정 자신들의 가치관을 설파하고 싶었다면 거기에 맞춰 새 드라마를 만들었어야 한다.


편의주의적으로 복잡한 재판이나 사건은 원작을 따오고 결말과 해결 방식만 살짝 바꿔 '이거 봐, 우리말이 맞다니까?' 라며 원작의 주제를 모독한 것은 엄연히 원작에 대한 모독이다. 단독 드라마로써의 리갈하이는 모르겠으나 리메이크 드라마로써 리갈하이는 최악이었다. 

작가의 이전글 할아버지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