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할아버지와의 이야기.
'벤자민 버튼의 시계는 거꾸로 간다.'
내가 꽤 뜻깊게 본 영화이다. 노인으로 시작해서 점점 어려지는 남자의 이야기. 현실에도 영화와 조금 다르지만 이런 경우가 일어난다. 비록 몸이 어려지는 것은 아니지만 정신의 시간이 거꾸로 가는, 바로 치매다.
신경정신과에 입원했던 날, 첫 상담을 마치고 의사가 나에게 물었다.
"혹시 밤귀가 밝으십니까?"
"아니요. 그렇진 않은데요?"
"아, 저기 혹시라도 불편하시면 말씀하세요. 함께 병실 사용하실 분 중에 치매 환자분이 계셔서."
'치매' 생소한 단어였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기는 했지만 난 그때까지 단 한 번도 치매 환자를 직접 접해본 적이 없었다. 꽤 긴장된 마음으로 병실에 들어갔다.
병실을 사용하는 사람은 나까지 포함해서 3명, 나와 20대 초반의 학생, 그리고 의사가 말한 바로 그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는 코를 골며 주무시고 계셨는데 환자복을 입고 있었지만 꽤 강인한 인상이셨다. 굵은 흰 눈썹에 정갈한 흰머리, 거기다 키도 크셨고 몸도 건장하셨다. 의사의 말을 듣고 상상한 것과는 꽤 다른 모습이었다.
'다른 노인분들 보다도 건강해 보이는데?'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나의 착각이었다. 밤이 되자 정말 의사가 경고했던 말들이 현실로 벌어졌다.
밤만 되면 할아버지는 혼잣말을 하셨다. 그것도 병실이 떠나갈 정도로 아주 크게, 그뿐이 아니었다. 침상에서 내려와 걷거나 자는 이들을 깨우는 일도 있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침상에 있던 할아버지가 바닥에 내려와 관등성명을 외치셨던 일이다.
어찌나 목소리가 또랑또랑하시던지 정말 이등병이 되신 듯했다. 그럴 때면 여지없이 간병인 아주머니가 할아버지를 달랬다.
"할아버지, 밤인데 조용하셔야죠. 도와드릴 테니까 어서 올라가세요."
"아닙니다! 여기서 자겠습니다!"
그 외에도 할아버지의 증상은 다양했다. 덥다며 옷을 벗기도 하셨고, 대학생이 되기도 하셨다. 간병인 아주머니의 손을 잡고 아내분의 이름을 읊는 날도 있었다. 짜증이나 화를 내는 것도 하루에 한 번은 있는 일이었다.
치매환자도 가끔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올 때가 있다고 들었는데 할아버지는 전혀 그렇지 못하셨다.
시간이 지나며 할아버지와의 생활에 적응했지만 밤마다 일어나는 소란, 뜬금없는 행동으로 할아버지에 대한 알 수 없는 거부감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침대에 멍하니 앉아 있던 할아버지가 날 만나기 위해 병원에 온 어머니를 향해 문뜩 질문을 건넸다.
"아들인가?"
"네, 할아버님."
"젊은 학생이 어쩌다가..."
처음으로 들어보는 할아버지의 점잖은 목소리였다. 뒤이어 할아버지가 날 향해 웃으며 말씀하셨다.
"학생 힘들겠지만 기운 내. 다 지나고 좋은 날이 올 거야."
진심 어린 걱정과 위로였다. 당신 여러모로 지쳐있던 난 처음 보는 할아버지의 그런 모습과 위로에 왠지 모르게 큰 위로를 받았다.
그날 이후 할아버지에 대한 거부감이 많이 줄었다. 그리고 할아버지에 대해 궁금해졌다.
이후 알게 된 사실에 의하면 할아버지께서는 오랜 시간 선생님으로 일한 분이란 걸 알았다. 날 걱정하며 위로를 건네던 할아버지의 눈빛이 제자를 보듯 따뜻했던 이유를 깨닫는 순간이었다.
아무리 시간이 거꾸로 가고, 그 속에 본인의 모습이 지워지더라도 살아온 인생은 어딘가에 반드시 남아있다. 시간과 나이, 건강이라는 피할 수 없는 녀석이 할아버지의 세월을 잡아먹었지만 할아버지의 본모습은 어딘가에 살아있었듯이 말이다.
할아버지는 이후 점점 건강이 안 좋아지셨고 결국 코에 관을 꼽으신 채 병원을 떠나셨다.
그날 저녁, 오랜만에 푹 잠들 수 있었지만 텅 비어 비린 할아버지의 침상이 어딘가 시리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