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한 나와 여행의 관계

여행과 약

by 정주구


요즈음 캐리어를 꾸릴 때면 든든하면서도 왠지 찝찝한 기분이 든다.


한 공간을 크게 차지하고 있는 저것들 때문일까.

캐리어 깊숙이 뿌리를 내린 것만 같은 안정적인 모양새로 나를 쳐다보는 시선의 주인은 바로 약들이다. 피곤할 수 있으니 발포비타민과 짜 먹는 한약, 종합비타민을 챙기고 환경이 바뀌면 화장실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 유산균, 방광염약, 지사제, 한방소화제를 넣고 혹시 모를 육탄전에 대비하여 메디폼과 연고, 파스, 일회용 소독약을 담고 잔병치레를 걱정하며 앞에 챙긴 약들의 배가 넘는 비상상비약을 집어넣다 보면 그들은 캐리어 한 면의 3분의 2 정도는 거뜬히 점령하고 누워있다. 그 주변은 당연하게도 컵라면이 메우고 있다. 이것 또한 영양제 아니, 비상상비약으로 보아도 무방하겠다.


더 나이가 들어서 캐리어 두쪽면을 몽땅 채운 약 뭉치들을 상상한다.




여행 가서 아프면 안 된다. 어디에서나 당연한 말이지만 여행지에서는 더더욱이 안된다. 이 당연한 말이 나의 캐리어의 큰 부분을 점령해 버린 그것들에 대한 항변의 본론을 여는 서문이다.


처음부터 이러지 않았다. 비상약은 무슨! 널린 게 드럭스토어(drug store)인데 아프면 가서 약 사 먹으면 되지! 했다. 그러다 일이 생겼다. '미친 사랑의 열병'을 앓던 어느 추운 겨울, 더 추운 맛을 보러 미국 동부로 떠났다. 사랑의 열병은 떠나기 전부터 몸살로 변모하여 비행기 안을 거쳐, 텍사스-워싱턴 DC의 왕복 4일을 로드트립 일정까지 따라다녔다. 타이레놀의 계보를 잇는 일명 서양 휘뚜루마뚜루 약인 애드빌을 한 알, 두 알, 세 알씩 과다복용하는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미친 상사병'인지 몸살인지 모를 것은 식을 줄 몰랐고, 여행의 후반부까지 나의 그림자가 되어 따라다녔다.


그렇게 여행 내내 골골거린 후로 약 뭉텅이는 점점 여행가방 내부를 잠식하게 되었다. 그뿐 아니라 위염, 식도염 내지는 시간의 흐름만큼의 알코올 해독으로 고생한 간 기능 약화 같은 노화에 수반되는 건강 문제도 캐리어 잠식에 한몫을 던졌다.




이런 류의 억척스러움, 내지는 변화가 나는 싫지 않다. 낯선 공기가 주는 설렘 뒤에 숨은 외로움과 두려움이 느껴질 때면 나는 스스로를 향한 아기자기한 정성을 바라본다.

영양제와 약은 스스로를 향한 귀여운 걱정과 관심의 표현이다.



그러니 여러분 모두 걱정하는 마음 숨기지 말고 여행가방에 꾹꾹 눌러 담아 잘 가져가시길.


귀한 내가 아프면 안 되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