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3만 원
돈이 없다.
큰일이다.
이십 대 초반에나 떴던 red alert이 오랜만에 머릿속을 울린다. 회사를 다니며 모았던 돈을 근 몇 개월간 탕진한 것이다.
그렇게 작가 놀이를 하며 유명을 달리한 통장의 0 몇 개, 나의 옛 수고, 눈치 보며 받던 야근수당이 유령이 되어 꿈속에 찾아올 것만 같아 숨이 막힌다. 숨이 막히니 동네 별다방 가서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마실까 하는 고민을 하는 걸 보면 현실감각이 떨어지는 것이 오히려 다행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돈은 없지만 행복이라도 하자.
얼음 잔뜩 넣은 아메리카노 그란데 사이즈를 벌컥벌컥 들이켜는 상상을 하며 옷을 입는데, 이번엔 메시지 알람이 울린다.
-양지구언니 : 주구야 이번 주 안에 서로 100만 원씩 환전해 놓자. 환율이 더 안 떨어질 것 같아.
아 맞다. 나 2주 뒤에 여행가지.
메시지 알람을 가장한 진정한 red alert이었다.
모공을 박차고 땀이 삐져나오는 느낌이 든다. 분명 파워냉방이 가동 중인 집 안이다. 그렇다면 이 인중땀의 출처는 어디인가.
가만히 가마니가 되어 일상복으로 환복한 후, 믹스커피를 뜯는다.
커피에서 나는 이 짠기의 출처는 어디인가.
땀인가 눈물인가.
운이 좋다고 해야할런지 모르겠지만, 내 돈으로 가는 첫 해외여행이다. 그중 이십 대 초반의 대부분의 여행을 송구스럽게도 부모님이 부담해 주셨다. 철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하며 쿠팡에 들어가 철분제가 얼마 하는지 찾는다. 정말이지 철이 없어도 너무 없다.
'피 같은 내 돈'의 의미를 위가 아리게 알게 된 지금 계획하는 여행은, 과거의 그것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양지구 언니와 숙소비 3만 원 차이를 저울질하며 고뇌하는 일이 추가되었다. 그렇게 진지하게 저울질하다 보니 회사 경비로 참석했던 런던 학회의 기억이 떠오른다.
언제 내가 런던에 오겠냐며 생애 마지막 여행처럼 돈을 썼던 기억의 그 아찔함에 눈을 질끈 감는다. 학회가 끝난 후로는 파리로 넘어가 2박에 70만 원 가까운 돈을 지불하고는 이른 아침부터 밤까지 밖을 돌아다니다가 잠만 자고 나왔던 기억의 넉넉함에 또 한 번 감은 눈에 힘을 준다.
안되지. 눈가주름까지 생기면 돈 더 나간다. 하며 힘겹게 눈을 뜨고 현실의 통장잔고를 마주한다.
나와는 다르게 경제관념이 제대로 박힌 양지구언니는 여행 계획단계서부터 결제의 핸들을 쥐고 엑셀 위를 날아다녔다. 한 달간의 유럽여행에 드는 만만치 않은 비용의 출처를 진두지휘하는 그녀의 모습은 책임감 있는 어른의 모습이었다. 여행을 준비하는 동안, 그녀의 강단에 반해 그 모습을 모방하며 점차 나만의 경제관념을 세워갔다. 이 글을 빌어, 어린 어른인 정주구를 리드해 준 어른 양지구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한다.
경비의 가격을 만원, 2만 원, 3만 원씩 저울질해 가며 그 쓸모를 찾는 과정이 주는 구질구질함에 우리 둘은 잠시 낙담을 하곤 했지만 하나의 낙담을 둘이서 나눠 드니, 그것으로 공기놀이를 할 수 있을 정도로 가벼이 느껴졌다.
타인과의 여행이 주는 장점이 아닐런지 하는 생각이 든다.
고작 3만 원을 가지고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