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 인라인스케이트, 자동차, 킥보드, 스키, 보드 중 적어도 하나 정도는 탈 줄 아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필자 주위는 그렇다. 이 모든 것을 못 타는 사람은 오직 한 명, 필자 밖에 없다. 일단 땅에선 두 다리로 걷는 것 말고는 자유로울 길이 없다는 말이다. 다룰 수 있는 이용수단의 수가 많을수록 자율성이 확대되어 더욱 다양한 범위의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만,
나는 그런 다양한 것 중 걷거나 뛰는 것(이마저도 숨이 차는 게 싫어서 자주 하지 않는다) 말고는 하지 못하는 ‘겁쟁이’ 겸 자유 편식자이다.
‘본투비 겁쟁이’라는 수식어에 걸맞게, 하지 못하는 이유도 오직 하나다. 무섭다는 것. 아마 유전이지 않을까. 핏줄을 타고 올라가다가 보면 아마 나와 비슷한 류의 ‘본투비 겁쟁이’ 조상님이 분명 계실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왠지 모르게 휴-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싶어 진다. 역시 혼자가 아니었군- 또는, 역시 거스를 수 없는 유전 탓이었군- 하며.
그런 잔잔하고도 얌전한 겁쟁이의 삶에 여행동반자가 작은 돌멩이 하나를 던졌다. 스페인의 어느 바다에서 수영을 하겠다는 말이었다. 분명히 제의가 아닌 ‘나는 수영을 할 거야’라는 다짐이었지만 그 혼잣말의 모습을 한 돌멩이는 나의 호수에 작은 일렁임을 만들었다.
곧바로 상상했다. 물속에서 몸이 자유로운 상상말이다.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각이었지만 그동안 모아 온 시각적, 청각적 경험을 바탕으로 나는 최대한 ‘마치 경험해 본 것 같은’ 물속의 내 모습을 만들어냈다. 작가의 능력이자 숙명이랄까.
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런 상상은 곧바로 바다에 둥둥 뜰 수 있을 것이라는 용기로 이어졌다. 아마 목욕탕의 온탕에서 발장구 치던 감각에서 나온 용기가 아닐는지 추측해 본다.
생각보다 별 거 아니더라.
자유로움이라는 거 말이다.
그리고 무서움이라는 거 말이다.
폐와 코에 소금물이 차 시큰거리는 통증을 조금만 견디어내니 곧바로 물에 떴고 나는 하계 올림픽 박태환 선수의, 또는 디즈니 인어공주의 그것을 흉내 내며 앞으로 나아갔다. 목욕탕의 용기가, 여행동반자의 작은 돌멩이가 ‘겁’의 장막에 가려져있던 자유로움 하나를 열어주었다.
그렇게 스페인의 타라고나와 이탈리아의 코모에서 나는 자유로웠다. 숨이 허락하는 동안 물고기를 따라다니는 자유란.
빛을 부숴 찬란한 윤슬을 반사하는 바다와 호수는 그 내면 또한 아름다웠다. 차마 마저 반사되지 못해 새어 들어온 빛이 물의 흐름에 따라 만들어내는 결을 나는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많은 것을 못하는 겁쟁이지만, 괜찮다.
이렇게 자연스러운 속도로 자유를 느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했으니 말이다. 혹, 더 할 수 있는 것이 생기지 않아도 나는 괜찮다.
그저,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면 수영장에 가야지- 하고 겁쟁이는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