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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주구 Oct 02. 2023

냄비밥과 해외여행의 관계

여행과 냄비밥


대식가 겸 한식애호가에게 장기 해외여행은 위胃태로운 시간의 연속이다.

무언의 압박을 주는 것만 같은 통잔잔고의 존재감에 못 이겨 배를 곯고 먹방 유튜브를 전전하다가 현실 자각 타임에 빠져 줄어들 생각 없는 위를 탓하고는 눈물로 밤을 지새우는 날들이 생기기 때문이다(정말이다). 그 통장잔고가 퇴직금이라면 죄책감이 더해진다. 자의로 온 여행에서 징징거릴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숨죽여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가져온 라면과 햇반이 동날 무렵, 스페인의 그라나다에서 칼을 빼어 들었다. 아니, 칼이 아닌 주걱을. 자칭 냄비밥의 대가인 여행동반자 S의 지인은 본인의 냄비밥 레시피를 소상히 적어 보내주었다. 내용은 이렇다.


<냄비밥 만드는 법>

1. 불린 쌀과 물을 1:1 비율로 준비한다.

2. 센 불로 끓이다가 냄비 뚜껑이 달그락 거릴 즈음 뚜껑을 연다.

3. 중 불에서 죽 농도가 될 때까지 휘젓고 뚜껑을 닫는다.

4. 약 불로 줄이고 10분.

5. 불 끄고 10분.


단숨에 아시안 마트로 달려가 초밥용 쌀 1kg를 사서 레시피를 차근차근 정독했다. 냄비밥의 대가는 약 불 이후로 뚜껑을 열지 말 것을 신신당부를 했다. 마치 어떤 괴담을 말해주는 사람처럼 절대 그것만은 안된다는 것을 강조했더랬다. 근질거리는 호기심을 참아가며 냄비밥 괴담을 이겨내고 뚜껑을 열었을 때의 그 희열이란! S와 나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우와! 진짜 밥이야!' 했다. 밥을 넣었으니 밥이 있는 것이야 당연하겠지만 주걱으로 밥을 휘저으며 구석구석 진짜 제대로 된 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생애 처음으로 냄비밥을 지은 본인을 대견해했다. 진짜 밥과 전 날 먹다 남은 불닭 소스 그리고 닭고기를 잘게 썰어 넣어 볶음밥을 했다. 약간 질게 된 밥으로 한 붉닭볶음밥의 쌀 알알이 형체를 잃었지만 살면서 처음으로 밥을 먹는 사람처럼 S와 나는 맛있게 먹었다.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고기 값이 한국에 비해 아주 저렴하고 풍미가 좋아서 밥반찬으로 대부분 고기요리가 올라왔다. 평범한 고기구이에서부터 닭볶음탕 그리고 제육볶음까지. 여기에 맛있는 병맥주를 곁들이면 더 이상 바랄 게 없는 시간이 찾아온다. 여행이 후반부에 접어들수록 늘어가는 한식 조리 실력 그리고 빈 병과 함께 밥상에서의 웃음이 많아졌다.


그렇게 아끼고 아낀 돈으로 여행지에서의 명물이라 불리는 것들을 하나씩 사 먹어보았지만, 그때마다 입맛 흥선대원군인 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숙소에서의 저녁 메뉴를 구상했다.  


누군가는 여행 가서 무슨 한식 타령을 하냐고 또는 촌스럽다고 혀를 찰 수 있지만,

여행에 정답이 어디 있겠는가. 확신을 가지고 확실하게 행복한 시간을 보내면 그만이다-하고 위는 통통하고 통장은 텅텅한 젊은 여행자는 말한다.




<사진> 밀라노에서의 밥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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