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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주구 Oct 06. 2023

바닷마을과 게으름의 관계

여행과 무한도전

'이제는...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


라는 정준하 씨의 유명 짤을 아는가


무한도전에 나온 이 말은 주문이 되어 읊조릴 때마다 웃음과 함께 무한동력을 주었다. 여행 듬성듬성 힘들 때면 여행동반자 S와 나는 서로의 귓속에다 이 문장을 소곤거렸다. 이 행위는 가벼운 유희거리가 아니며 철저히 여행 규칙 제10장인 <상대방 텐션이 떨어져 보이면 이. 더. 물 선창하기>에 의해 집행되었다. 참고로 제9장은 <상대방 텐션이 떨어져 보이면 데이식스 영상 틀기>였다. 순도 높은 내향인들의 여행 준비란 이렇게나 치밀한 것이다.


이 주문은 스페인의 작은 바다 마을 타라고나에서 특별히 자주 선창되었다.

기차로 한 시간 반 가량 걸리는, 아니 분명 그럴 예정이었던 타라고나행 기차에서 차창 밖으로 보이는 바다에 가슴 설레었다. 수도 근교 해안가라 그런지 기차 안은 휴가를 즐기러 가는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들 투성이었다. 약속된 한 시간 반이 지나자 스피커를 따라 안내말이 나오고 우리는 하차 준비를 했다. 플랫폼의 엘리베이터는 이미 오래전부터 고장인 듯 보였고 45도에 육박하는 작렬하는 기온 안에서 20kg짜리 캐리어를 들고 긴 계단 오르락내리락하기를 반복했다. 내리는 사람도, 역 근처에도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작은 바다 마을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기에 그리 신경 쓰지 않았고 숙소를 가기 위해 구글 맵을 켰다. 그랬더니 지도에 찍혀있는 우리의 위치가 타라고나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다. 바르셀로나에서도 현재 위치의 오류를 몇 번 경험했던 터라 '얘 또 이러네'하며 앱을 몇 번이고 껐다 켰고 동네의 인터넷망을 의심하게 될 즈음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여기.. 현재 위치 맞는데?"

그렇다. 빌어먹을 게으름뱅이 유럽 기차의 악명을 생각지 못했던 것이었다. 무려 아직 반절밖에 오지 못한 것에 경악을 금치 못하고 역으로 돌아가 역무원에게 표를 보여주고 손짓 발짓을 해가며 설명했다. 역무원은 흔히 있는 일인 듯 표를 들여다보곤 문을 열어주었다. 다시 똑같은 계단을 몇 번 오르락내리락하고 내린 플랫폼으로 돌아갔다. 주위에 있는 아주머니 한 분께 여기가 타라고나행 플랫폼이 맞냐고 물었고 돌아오는 대답은 반대편 플랫폼. 재개될 일 없는 엘리베이터를 원망하고 다시 또 계단행이었다. 한 사람도 없는 그 반대편 플랫폼 의자에 앉아 우리가 가야 할 방향으로 지나치는 기차들을 바라보며 불안한 마음과 함께 온몸이 땀으로 젖어갈 때 즈음 입을 뗐다.


"이제는..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

깔깔거리며 하릴없이 기차를 기다리다가 한 사람을 붙잡고 이곳에 타라고나행 기차가 오는지 물어보았다.


"타라고나는 반대편이야. 여기는 바르셀로나행이야"


주위의 사람들도 수긍했다. 아마 다수가 빈 플랫폼에서 빈 동공으로 깔깔대는 아시안 여자 둘을 신경 쓰고 있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한 시간 반 거리를 두 배 걸려 타라고나에 도착했다. 이동할 때는 나사를 빼놓지 말자는 다짐을 곁들이며 그렇게 이. 더. 물과 안녕하게 되었다.

 

분명 그렇게 될 줄 알았다.




<사진> 타라고나의 해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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