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효자손보다 불효자 손이 더 시원하지?
오늘도 늦잠을 잤다.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왼쪽으로 오래 누워있었더니 배겨서 오른쪽으로 돌아누우며 핸드폰을 켰다.
역시나, 이놈의 인기. 못살겠다 정말.
그 짧은 밤새 나 정주구를 찾는 수- 많은 연락들이 쌓여있
지 않았다.
못살겠다 정말.
하며 누운 쪽 방향으로 눈물이
아닌 콧물이 흘렀다.
못살겠다 정말. 이놈의 비염
봄 이놈! 얼른 가버려.
이전에 언급했던 그 가까운 편집자 만은 이모티콘 하나로 나의 안부를 묻고 있었다. 조금 더 써주지. 힝
그래도 이 사람 덕에 고독사는 면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글을 빌어 감사의 말을 전한다. 계속 챙겨줘잉
그 연락 위로는 '아부지♥♥'와 그냥 '오빠'의 톡이 있었다.
예상외의 연락에 잠이 확 깨
진 않은 채로 톡방을 열어보았더니만, 참- 귀여운 작당모의를 하고 있었다. '아부지♥♥'는 어머니를 제외한 3명의 톡방을 파서 <천사님 30년 근무에 따른 우리들의 계획ㅎㅎ>이란 제목으로 1에서 4번까지의 이벤트를 기획해 놓으셨더랬다. 그리곤 대답 없는 톡방에 여러 호들갑을 써놓으셨다. 귀여움은 유전인가 보다. 필자가 이렇게나 귀여운 이유가 여기 있었다.
어머니는 대학병원 간호사다. 그리고 한 병원에서 30년 근무한 노장이다.
태초의 기억부터 워킹맘의 모습을 해서 그런지 어머니의 일에 대해 큰 감흥이 없었다. 약 20년 전에 눈 비비고 일어나 화장하는 어머니의 무릎에 앉아 가지 말라며 울며불며했던 기억이 그것이다. 또, 그보다 조금 더 커서는 어린이집 최고참인 오빠와 신참인 내가 퇴근하는 어머니를 기다렸던 기억이 있다. 우리는 집에서 차로 5분 거리의 어린이집에 다녔었는데, 어머니의 퇴근시간을 맞춰 내리기 위해 봉고차에 나란히 앉아 옆, 그 옆, 또 그 옆 동네의 친구들이 모두 하원하는 것을 보고 나서야 가장 마지막으로 내렸다. 등원 5분 거리가 하원할 때는 60분으로 늘어나는 어떤 시간의 장난 속에서 어린 나는 꾸벅꾸벅 졸았고 오빠는 그 작은 것이 또 오빠라며 나를 지키려고 잠에 들지 않았다. 그것도 모자라서 우리는 둘은 노란색 방범대 모자를 쓰고 집 가는 골목길 앞에 앉아서 엄마를 또 기다렸다. 그러다 보면 저 멀리(최근에 가보니, 그리 길지 않았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근데 기억 속의 골목은 왠지 엄청나게 길다) 골목 끝에서 긴박한 구두 소리가 들렸다. 골목 끝에서 엄마는, 항상 매번 뛰어왔다.
그로부터 약 2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 가족이 모두 모일 때면 어머니는 그때 얘기를 한다. 참고로 어머니는 기억력이 꽝이다. 몇 해 전에 유럽여행을 다녀왔음에도 불구하고 티브이에 유럽의 모습이 나오면 내가 저곳을 갔냐고 물어볼 정도다. 그런데 그 골목에서의 일은 처음 듣는 사람에게 설명하는 것처럼 아주 상세히 설명하신다. 나는 왠지 그게 참 마음이 아프다.
어머니는 마음이 여리다. 지금도 참 여린데, 옛날에는 더 여렸다고 한다. 간호계의 태움 문화를 겪으며 4년 차가 될 때까지도 화장실에서 막 우셨다고 했다. 그때는 오빠와 내가 더 많이 어릴 때였고, 그녀가 우리 집안의 실질적인 가장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의 나만큼 어렸다.
예전에 옆 팀 팀장님은 초1, 그리고 어린이집 신참 아들 둘을 둔 워킹맘이었다. 그래도 그 와중에 박사까지 하고 능력이 좋아 상사와 팀원들에게 인정받았다. 유연하고 당당한 모습이 인상 깊다. 그런 멋진 커리어 우먼으로서의 모습이 무색하게, 퇴근할 때쯤이 되면 손톱을 잘근잘근 씹으며 대표방 앞에 서서 인사할 타이밍을 엿봤다. 뛰어 나가는 건 기본, 어쩔 때는 책상 모서리에 골반을 찧기도 하고, 가방의 물건들을 우수수 떨어뜨리기도 하고, 차키를 놓고 나가서 급하게 다시 돌아오기도 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몇몇 동료들은 왜 이리 정신이 없으시지? 하고 슬슬 웃기도 했지만, 나는 웃을 수 없었다. 절대 웃을 수 없었다. 그녀의 다급한 구두소리는 우리 엄마의 그것과 닮아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 시절의 엄마 나이가 되고 나니 회사 비상계단에서 막 우는 일들도 생겼었다. 워킹맘의 팀원으로서의 또 구석에서 우는 사회초년생으로서의 역할을 떠나보낸 지금, 비로소 엄마의 수고를 조금이나마 짐작해 본다.
미안해 죽겠다.
그리고 고마워 죽겠다.
그렇게 아등바등 살게 해서 미안하고,
그렇게 키워놨는데 퇴사자가 되어서 미안하고,
퇴사자가 되어 돌아온 나에게 열무비빔밥을 해줘서 고맙다.
나랑 같이 자고 싶다고 앙탈을 부려줘서 고맙고
등 긁어달라고 해서 고맙고
보들보들한 뱃살을 만지면 깔깔 웃어줘서 고맙다.
어제 <엄마 생각>을 발행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오늘, 어머니께서 30주년 연공상을 수상하셨다.
기쁘지 않았다. 축하한다는 말을 할까 하다가 미안하다고 했다.
엄마를 30년이나 일하게 해서 미안해.
비록 그 자리에서 꽃다발을 건네지 못했지만,
가까운 미래에 효도하겠다는 불안정한 말 밖엔 할 수 없는 못 미더운 불효자이지만,
당신의 다급한 구두소리와 숨죽여 흘리던 눈물을 먹고 자라,
나는 당신의 다급함과 눈물, 그 너머를 헤아릴 수 있는 어른이 되었다.
비록 어린 어른이지만,
당신의 구두소리는 여전히 나를 키우고 있다는 것을
나는 이제야 안다.
당신의 나이를 천천히 거슬러 올라갈 테니,
당신은 오랫동안 뱃살과 등을 내어주었으면 좋겠다.
끝까지 무언가를 내어달라고 하는 나는 아마,
끝끝내 당신의 어린 어른인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