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상가
│ 넌 여덟 살 때부터 '투데이 쇼'에 갈 거란 환상 속에 살지만 그런 일은 없어.
│ 알고 있어요, 안다고요
│ 내 잘못도 있지. 네 아빠가 허황된 꿈을 심어줬어.
네가 큰 꿈을 꾸면 자랑스러워하기에 내버려 뒀다.
│ 무슨 말이에요?
│ 꿈을 가지는 건 좋아.
여덟 살 때는 귀여웠지.
열여덟 살엔 당차 보였다.
스물여덟 인 지금은 솔직히 내가 다 민망하다.
상처받기 전에 현실에 눈뜨란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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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굿모닝 에브리원' 中]
몽상가 : 실현성이 없는 헛된 생각을 즐겨하는 사람
나는 스스로 몽상가라고 일컫는 사람이었습니다.
만, 본래 의미는 저의 의도와는 다르게 조금 더 과격한 의미를 담고 있더군요.
‘상상을 즐겨하는 사람’ 내지는 ‘구름처럼 희미한 생각을 자주 하는 사람’ 정도의 의미를 가진 단어라고 여겼는데, ‘실현성이 없는’, ‘헛된 생각’이라는 거센 구절 뒤에 이어진 ‘즐겨하는 사람’이라는 표현을 마주했을 땐, 아- 이거 꽤나 폭력적인 단어였구만- 하고 혼자 생각했습니다.
당연하게도, 단어는 잘못이 없습니다. 허나, ‘실현성이 없는’, ‘헛된 생각’, ‘즐겨하는 사람’은 너무나 정곡을 찌르는 표현이지 않나요? 아픕니다.
이 글의 몇 줄을 읽으며 내장 한쪽이 찌릿찌릿 아려오는 분들이 분명 계실 겁니다.
저와 마찬가지로 정곡을 찔린 분들이죠.
제대로 몽상가 당첨입니다.
선물은 이 글입니다.
전국을 넘어 세계의 모든 몽상가들에게 바칩니다.
당신들의 ‘몽상가력’은 어떻게 되나요?
일단 미리 얘기하자면 이 필자, 만만치 않습니다. 일상에서의 ‘몽상가력’에 대해 말하자면, 비행기를 탈 때 나와 함께 한 이들이 세계에 유일하게 남은 인류가 되었다는 상상을 하기도 하고, 멋스러운 연예인을 볼 때면 지독하게 엮이는 로맨틱 드라마 한 편은 뚝딱 만들어낼 정도이죠. 그런 ‘실현성 없는 헛된 생각’은 저의 일상에 밀도 있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인생에서의 ‘몽상가력’을 얘기하자면 음- 조금은 숙연해집니다.
그리 길지 않은 인생을 관통해 간 필자의 몽상가 기질을 소상히 얘기하면 성격이 급한 독자들은 다음 글로 눈길을 돌릴 테니, 구구절절 나열하진 않겠습니다.
다만, 이 글의 시작을 열었던 <굿모닝 에브리원>의 대화 몇 줄로 대략의 설명은 충분하겠습니다.
그런 어른이 되어버렸습니다.
현실에 눈을 떴고, 그래서 상처받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현성 없는 헛된 생각’을 놓지 못하는 어른이 되어버렸습니다.
분명 옛날에는 꿈이 있는, 꿈이 있어서 바람직한 청소년이었는데,
이제는 몽상가 겸 가능성 중독자입니다.
‘바람직한’이 사라진 게 못내 속이 쓰립니다.
인생 모두를 정통 몽상가로서 살아온 탓이라고 해야 할까요, 관성이라고 해야 할까요.
정곡을 뚫고 지나간 단어의 의미와 영화 속 대사를 마주해도 끝끝내 이것을 그만둬야겠다는 생각만은 들지 않습니다.
단지 불특정한 누구에게 미안하다고 얘기를 해야 할 것만 같은 송구스러운 기분이 듭니다.
미안합니다.
이런 글을 쓰면서도 나는
훗날 꿈을 실현시키고
찌질한 몽상가였을 적의 한 편린으로써
이 글을 넘겨보는 상상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