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 일상이 될 때

by 주하

10일간 주어진 첫 직장의 여름휴가. 어디든 떠나지 않으면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되도록이면 일상과 멀리 떨어진 곳이어야 했다. 일상이 힘들었기에 잠시라도 벗어나고 싶었다. 오래전부터 가고 싶었던 파리로 정했다. 8일을 파리에서만 보낼 것인가, 쪼개서 주변 나라들도 갈 것인가. 고민 끝에 파리에서 만의 8일을 선택했다.

파리에서 시작해서 파리에서 끝나는 여행이다. 즉 여행하는 동안 무거운 짐을 이고 다닐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캐리어와 보통 가방 하나, 작은 가방 하나를 챙겼다.


여행 첫날, 가방에 필요한 것을 담았다. 남는 건 사진뿐이기에 챙긴 DSLR, 비 올 때 쓸 우산 겸 양산, 목마를 때 마실 텀블러, 배고플 때 먹을 비상식량, 환전해간 현금들, 급할 때 쓸 여행용 휴지, 현지 정보가 가득 담긴 여행책자, 맛집들과 유명 관광지가 박힌 커다란 지도, 비상시 필요한 연락망과 여권, 끄적이고 싶을 때 필요한 수첩과 연필. 이 모든 것들을 크지 않은 보통 크기 가방에 꾸역꾸역 담았다. 지퍼를 억지로 잠그고 어깨에 멨다. 눈앞에서도 훔쳐간다는 파리였다. 여행 내내 혹여라도 누가 훔쳐갈까 봐 손으로 움켜쥐며 다녔다. 여행이 끝날 때쯤 많이 걸어서인지 가방 때문인지 온몸이 쑤셨다. 셋쨌날이었다. 계산을 하려고 돈을 꺼냈다. 그 속에 바글바글 거리던 소지품들과 눈이 마주쳤다. '이 소지품들이 과연 다 필요할까?' 숙소로 다시 갔다. 가방을 비우고 미니백을 꺼냈다. 카드와 핸드폰만 들고 길을 나섰다.

가방을 비우자 그제서야 파리의 일상이 눈에 들어왔다. 가진 게 별로 없으니 훔쳐갈 걱정도 덜었고 긴장도 풀어졌다. 여행책자의 맛집을 찾아가는 대신 갓 구운 고소한 냄새가 나는 빵집으로 향했다. 방금 만든 따끈한 빵을 종이봉투에 담아 근처 공원으로 걸어갔다. 잔디밭에 누워 햇살 아래 여유로이 하루를 즐기는 사람들. 벤치에 앉아 그 한가로움 속에서 바게트를 뜯었다. 이렇게 딱딱한데 파리 사람들은 왜 좋아할까?라고 작게 툴툴거리며.

유명한 언덕 위 계단에 앉았다. 너무 자주 들어서 익숙한 그곳이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풍경사진을 몇 장 남기고 걸음을 옮겼다. 목적지 없는 걸음은 낯선 동네로 안내했다. 사이사이 골목으로 사람 사는 집들이 늘어져 있었다. 낮은 주택가에 대문도 색색들이 다양했다. 어느 하나 비슷한 대문이 없었다. 파란 대문 위로 초록 덩굴 나무들이 늘어져있고 색색의 꽃들이 피어있었다. 파리의 낭만이 묻어있었다.

한 번쯤 꼭 가까이서 보고 싶었던 에펠탑. 그 아래 잔디밭에 누워 올려다보았다. 가까이서 바라보는 에펠탑보다는 배경으로 덮고 있는 푸른 하늘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무 생각 없이 누워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 얼마만이던 지. 여행이 일상이 되는 순간이었다. 느리게 파리의 피부로 스며들어갔다.




한 여름 8일간의 추억은 여행의 의미를 특별하게 했다. 길다고 여겼던 2박 3일도 짧게만 다가왔다. 여행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올 때면 여행이 더 그리워졌다. 채워지지 않는 갈급함이었다. 마음속에 꾸역꾸역 쌓인 갈증은 1년 살기 장기 여행으로 실현되었다. 그렇게 속초. 좋아하는 속초에서 1년 살기를 시작했다. 여행으로 자주 들락날락거렸던 속초. 바다를 산책하고, 맛집에 가서 음식들을 사 먹고, 또 바다에 간다. 여행 코스였다. 어둑해진 바다를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고속도로가 아니어서 낯설었다. 3시간 거리가 아니고 10분이면 도착하기에 이상했다. 집에서 24시간 배경으로 함께인 동해바다와 설악산, 청초호수를 볼 때면 꼭 호텔에 와있는 기분이었다. 나무뿌리가 뽑힐 것처럼 불어대는 동 바람에 '여기가 어디지? 난 왜 여기서 이 바람에 힘들어하고 있는 걸까?' 정신까지 혼미해졌다. 집은 속초였지만 마음은 경기도에 머물고 있었다.


그럼에도 갈수록 속초가 더 좋아졌다. 관광객들 사이에 유명한 맛집보다 허름하지만 현지인들이 즐겨 찾는 식당이 보이기 시작했다. 즐겨 찾았던 속초해변 보다 더 조용하고 맑은 고성의 바다가 눈에 들어왔다. 솔밭이 만들어주는 그늘 아래 에매랄드빛 나는 푸른 해변, 우리 가족의 아지트 해변이 되었다. 마트를 들렸다가 갑자기 바다가 보고 싶어 들린 밤바다. 10분 만에 마실 가듯 들릴 수 있는 밤바다가 좋아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남편과 커피가 마시고 싶어 가볍게 들린 카페에는 설악산의 장엄한 초록이 깔려있었다. 평일의 속초는 조용하다. 낮에 길을 걸어 다니는 사람도 도로 위 차들도 적다. 여름휴가 때 빼고는 고요할 정도로 한적한 거리. 작은 도시에 살고 있다는 실감. 여행이 일상이 되는 순간들이다.


"만약 당신에게 충분한 행운이 따라 주어서 젊은 시절 한때를 파리에서 보낼 수 있다면, 파리는 마치 '움직이는 축제'처럼 남은 일생에 당신이 어딜 가든 늘 당신 곁에 머물 거라고. 바로 내게 그랬던 것처럼."


헤밍웨이가 말했다. 그의 말처럼 속초에서 보내는 이 젊은 시절이 움직이는 축제가 되어 남은 일생에 어딜 가든 우리 곁에 머무르길 바래본다. 헤밍웨이가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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