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처럼 아이를 등원시키고 도서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문 앞까지 가다 멈춰 섰다.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집으로 가서 차키를 가지고 근처 카페로 향했다. 거실에서 매일 보이는 호텔 건물 28층에 있는 카페. 집에서 차로 5분도 안 걸리는 거리에 있다.
<속초 마시랑 제빵소>
1층의 마시랑 제빵소에서 커피나 빵을 사고 28층 호텔 레스토랑 겸 카페에서 먹는 시스템이다. 금요일 오전 10시라 사람이 적을 것으로 예상했는데 주문하는 곳에 줄이 꽤 있었다. 출입 명부를 적는데 지역 칸에 온통 서울 경기뿐이었다. '속초'라는 두 글자를 적는데 느낌이 이상했다.
커피를 주문하고 뒤쪽 엘리베이터를 타러 갔다. 3대가 나란히 있었고 로비에서 혼자 탔다. 당연히 금방 28층까지 올라갈 줄 알았다. 2층부터 시작해서 층마다 사람들이 탔다. 층에 탄 사람들은 각각의 행선지를 눌렀다. 숫자 칸의 불빛이 금세 가득 찼다. 그랬다. 레지던스 호텔의 여름 안 엘리베이터는 바빴다. 세컨하우스로 사용하면서 주말에 들리는 사람들, 여름휴가 때 장기 체류하는 사람들, 짧은 휴가를 즐기러 온 여행객들까지 건물 안에 사람들로 가득했다. 끝날 것 같지 않은 시간이 끝나고 28층으로 올라왔다. 실내에는 4~5팀이 있었다. 가족이 , 친구들끼리, 연인이 다양하게 보였다.
<속초 더블루테라호텔 28층>
바다가 정면으로 내다보이는 테라스로 나가보았다. 뻥뚤린 사방으로 바다가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늘 한점 없고 불어오는 바람마저 열기로 데워져 있었다. 다시 실내로 들어와 바다가 보이는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2년 전 속초로 이사 오고 유명 관광지나 카페, 식당 등을 갈 때면 주변 사람들도 다 여행객으로 보였다. 체류 시간이 지날수록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점점 여행객과 현지인이 분류돼서 보이기 시작했다.
여행객들은 대부분 여행지에서 시간이 한정되어있다. 한 곳에서 일정이 끝나면 다음 일정이 기다린다. 며칠의 시간 동안 작은 일부분인 것이다. 그렇기에 마음 또한 그곳에 다 풀지 않는다. 금방 떠날 곳이기에 장기간 보낼 곳이 아니기에. 캐리어에 싸온 옷만큼, 딱 입을 옷만큼 짐을 풀듯이 마음도 이곳에서 지낼 만큼만 푸는 것이다. 옷장에 잠깐 입을 몇 벌만을 옷걸이에 거는 것과 서랍장에 차곡차곡 전부 다 넣는 것이 다른 것처럼, 마음도 다르다. 여행을 온다는 것은 숙소 옷걸이에 마음을 몇 개만 걸어두는 것과 같다. 몇 개의 옷걸이로 여행을 하고 즐긴다. 나머지는 집 옷장 안에 그대로 걸려있다. 입을 옷이 한정돼 있기에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다. 여행 중에는 대부분 이를 잘 못 느낀다. 집에 도착해서 짐을 풀고 나서야 몸이 느슨해진다. 느슨해진 호흡 사이로 긴장도 빠져나간다.
시장과 백화점을 갈 때 마음의 무게가 다르다. 그 무게는 차림새로 표출된다. 동네 시장에 장을 보러 갈 때는 평소 복장으로 간다. 슬리퍼를 신고 츄리닝 바지에 편한 면티 하나면 끝이다. 화장도 하지 않는다. 반면 백화점에 쇼핑을 하러 갈 때는 점원들부터 쇼핑객들까지 아무래도 신경이 쓰인다. 슬리퍼보다는 샌들을, 츄리닝 바지보다는 청바지를, 면티보다는 블라우스를 또는 예쁜 원피스를 입게 된다. 여행지도 마찬가지다. 동네를 갈 때보다는 조금이라도 예뻐 보이는 단정해 보이는 옷을 찾게 된다. 사진도 찍어야 되고, 여행이 즐겁고 예쁘게 추억되길 바라는 마음도 있기에. 관광지에서 여자들을 둘러보면 세련된 옷들, 악세사리들, 옅은 색조화장이 근사하게 어우르고 있다. 동네 마실에서는 볼 수 없는 차림들로 몸을 두르고 있다.일상과 떨어진 거리가 느껴진다.
사랑에는 3년 정도 유효기간이 있다고 한다. 미국 코넬 대학의 '신시아 하잔'교수가 미국인 5천 명을 대상으로 연구한 결과에서도 서로에게 열정적인 감정을 느끼는 기간이 평균 18개월에서 30개월 정도라고 이야기한다.
사랑에 빠질 때 나오는 호르몬으로 도파민, 엔돌핀 등이 있다. 이 호르몬들은 일정 기간이 지나면 체내에 익숙해지고, 사라지게 된다. 사랑에 유효기간이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익숙해진 호르몬은 우리에게 더 이상 자극을 주지 못한다. 여행객들은 도착한 여행지와 사랑에 빠진다. 오랜만에 다시 보는 혹은 처음 보는 바다에 설레인다. 신선한 자극에 흥분되고 활력이 흐른다. 결코 몇 년이고 함께 했던 집에서 느낄 수 없는 감정들이다. 여행지에서만 나오는 호르몬이 여행 내내 함께 인 것이다. 사랑과 감기는 숨길수 없다는 말이 있다. 여행지에서 느끼는 작은 사랑도 숨길 수 없다.
반면 나는 이렇다. 이 카페에서 보내는 시간이 며칠의 일부가 아니다. 집 거실에서 매일 내다 보이고, 차로 5분 거리에 언제든 올 수 있는 일상이다. 일상이기에 평소 신는 만원 짜리 슬리퍼와 검정색 츄리닝에 면티 한 장, 어깨에 하얀 에코백 하나 걸치고 왔다. 짧은 단발머리는 아침에 대충 묶은 그대로이며, 어떤 악세사리도 없다. 얼굴에는 선크림 하나만 얇게 덮여있다. 햇볕으로 생긴 주근깨들이 그대로 보이고 얼굴은 민낯에 가깝다. 지금 카페 안을 아무리 둘러봐도 동네 마실 차림은 나 혼자다. 주변이 여행객들로 가득하다.
글을 계속 쓰다 보니, 방명록에 지역을 적을 때 느꼈던 감정이 무엇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나도 불과 2년 전까지만 해도 이들과 같이 수도권에 살며 3~4시간은 걸려야 이곳에 올 수 있었다. 이제는 지역에 '속초'라고 적어야 하고 무리 속에 혼자 현지인이 되어 앉아있다. 혼자 이방인이 된 기분이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사이에 앉아있는 기분이 든다. '속초'라는 옷걸이에 마음을 다 걸어둔 줄 알았는데, 아직도 풀지 않은 마음이, 서울에 남아있는 마음이 있나 보다. 어쩌면 평생을 살아도 다 풀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여행객과 현지인 사이, 그 틈에서만 존재할지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