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른한 휴일의 오후 시간이었다. 종일 집에 있다가 잠깐 바깥으로 나왔다. 다시 짧아져가는 해의 길이와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가을 냄새가 묻어났다. 금세 묵어있던 마음이 활짝 환기되면서 산뜻해졌다. 집으로 들어가 가족과 이 기분을 나누고자 밤 산책을 넌지시 던져보았다. '제법 시원해' 이 한 마디에 덥석 '그래' 외치며 밤 산책을 시작했다. 둘째 꼬맹이는 유모차에 태우고 아빠랑 첫째 꼬맹이는 엄마 손을 잡고 출발이다. 처음에는 그저 동네 산책 정도 하려 했는데 상쾌한 바람이 바다로 우리 등을 떠밀었다. 그렇게 갑자기 밤바다 산책이 되었다. 토요일 저녁 7시가 넘은 시간, 걸어가는 길 위에는 20대로 보이는 연인들을 몇 번 마주쳤다. 막 여행을 와 설레는 마음을 푸는 대화 소리가 바람에 실려왔다. 10분 정도 걷고 나서 젤라또 아이스크림집이 있는 새마을 사거리에 다 달았다. 늦은 저녁에도 불이 켜있었고 사람들이 보였다.
2020년 1월 낮에
여행할 때면 그 지역의 맛있는 아이스크림 집에 꼭 들르는 편이다. 메인 식사를 하고 다음 식사 사이에 그냥 구경만 다니기에는 뭔가 아쉽고 섭섭할 때 먹어주기 좋다. 맛있는 점심을 먹고서 들른 디저트 집이 맛이 없으면 '에잇, 별로네. 그래도, 점심이라도 맛있었으니 됐지'라고 한마디 하고 가볍게 넘겨버린다. 그런데 디저트까지 맛있으면 '정말 맛있다. 오늘 여행은 완벽한데 기분 좋다' 라며 올라가는 만족감으로 종일 기분이 좋아진다. 게다가 아이스크림은 웬만해서는 맛이 없을 수가 없기에, 안전하게 여행의 텐션을 올려주는 작은 의식 같다. 물론 점심을 배부르게 먹고서 아이스크림집 가자고 하면 남편은 ' 또 먹어?!' 하며 놀랜다. 이럴 때면 남자에게는 없는 디저트 배가 여자에게만 있는 게 분명하다. 첫째 꼬맹이도 밥 먹고 후식으로 '아이스크림! 아이스크림'을 자주 외치는 거 보면 더 그렇다.
속초에 여행하듯 1년 살기를 시작하고 벌써 2년 차고 2주 뒤면 3년 차 시작이다. 그런데 아직도 ,'라또래요' 를 들려보지 못했다. 갈 때마다 줄이 서있었기에(분비는 날에 가서 그런가 몰라도).추운 겨울이 되야 좀 한가해진다(아이스크림 식욕도 줄어들지만). 다음 산책 때는 꼭 먹어보리다 마음먹고 가게를 지난다.
아이스크림집을 지나면 과일가게 겸 작은 슈퍼가 두 개 나온다. 수박부터 잘 익은 복숭아, 참외, 사과, 자두에 포도까지 여름 철 과일들이 종류별로 진열돼 있다. 여기에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빵과 감자, 고구마, 미역까지 있다. 평소 과일을 좋아해서 여행지에 도착하면 과일을 한 두 종류는 꼭 구입한다. 생각보다 이런 과일가게가 잘 보이지 않는다. 갈수록 대형 마트들이 늘어가면서 작은 슈퍼나 과일가게가 자취를 감추고 있나 보다. 과일가게를 찾지 못하면 편의점이라도 들려본다. 운이 좋으면 빨간 망에 들어있는 귤 한 줄 정도 건질 수 있다(맛도 그냥 그런). 그래서 이런 작은 과일가게를 발견하면 여행도 순조롭게 흘러가는 기분이다. 좋아하는 과일을 숙소에서 한 움큼 베어 물면서 하루의 여행은 마무리 된다.
과일가게를 지나면 이정숙 왕 손만두 빵집이 나온다. 속초로 이사 오고 맨 처음 동네 산책을 갔을 때 우연히 먹어보았다. 그날 손으로 직접 만든 찐빵과 만두가 막 쪄서 나올 때면, 뜨거운 김이 폭풍처럼 올라오면서 그 아래 자리하고 있는 뽀얀 토실토실한 모습에 보고만 있어도 배가 불러온다. 종류별로 한아름 묵직하게 한 손에 부여잡고 나머지 한 손으로 바로 한 입 베어물 때 정말 행복이다. 베어문 입 사이로 뜨거운 입김이 새어나가고 입 안에는 균형 잡힌 만두소와 쫄깃하면서 부드러운 피가 조화를 이루며 목구멍으로 녹아든다. 이 집 만두와 찐빵을 한번 맛본 뒤로 줄이 길어도 기다리며 꼭 사게 되었다. 특히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선선한 바람이 불어올 때나 가을에서 겨울로 바뀌면서 옷을 한차례 여밀 때면 더 그리워진다.
여기서 조금 더 내려가면 우동당이 나온다. 작은 주택을 리모델링해서 만든 작은 가게다. 여기는 정말 입소문이 난 건지 아니면 안에 테이블이 하나밖에 없는 건지 줄이 장난 아니다(아무래도 테이블이 둘 이상은 되겠죠?). 입소문이 그래서 무서운 건가 보다. 갈 때마다 줄이 너무 길어서 아이와 함께 가는 우린 엄두도 내지 못했다. 창밖으로 어렴풋이 풍겨오는 담백하면서 소박해 보이는 국물 냄새에 입맛만 쩝쩝 다시며 지나갈 수밖에. 우동에는 두 종류가 있다. 휴게소에서 먹을 법한 보통맛의 우동과 줄 서서 먹는 생각나는 우동이다. 왜 최하 맛은 없냐면 우동은 발로 끌여도 맛이 없을 수가 없기에, 보통은 그냥저냥 다 먹어줄 만하다. 그런데 줄 서서 먹는 우동은 먹어도 먹어도 자꾸 생각이 나는 맛이다.
신혼여행으로 하와이 호놀룰루로 갔을 때이다. 차 렌트를 4일 차부터 신청했기에 3일까지 계속 걸어 다녔다. 여기저기 걸어 다니는데 줄이 길게 늘어선 우동집(마루카메)이 눈에 띄었다. '오호, 여기도 줄 서서 먹는 우동집이구나'눈도장을 해두고 다음날 오전 한가한 시간대에 다시 향했다. 일찍 가도 줄은 있었지만 기다릴 만했다. 외관상으로는 특별해 보일 건 별로 없었다. 조금 더 통통해 보이는 우동면발정도? 따끈한 국물 한입 들이키고 면이 입에 들어가는데 단정한 조화로운 마법이 일어나며 금세 그릇이 비워졌다. 신기한 건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계속 생각나는 것이다. 그래서 8일 동안 거의 매일 이 집에 들러 우동으로 한 끼를 때웠다. 아직도 하와이 하면 이 우동집이 생각날 정도로. 우동당도 이런 느낌일까 짐작해본다. 다음에 비수기 비 오는 날 평일 오전에 가봐야지. 하고 벼르고 있다.
우동당을 지나 문 닫힌 가게들을 몇 개 더 지나면 바다 앞 사거리 편의점이 나온다. 딸기주스가 마시고 싶다는 꼬맹이 핑계 삼아 우리가 마실 맥주를 골라본다. 눈에 띄는 '빨간 4개 만원' 스티커. 지나칠 수 없다. 종류별로 고르고 골라 두둑하게 밖으로 나온다. 바다 보면서 맥주 한 캔 씩 하려는데 오랜만에 들른 속초해변에는 현수막이 크게 걸려있다. '19시~06시, 야간 음주, 취식 금지'. 여름철 휴가지로 변신한 속초해수욕장은 공사 중이어서인지 모래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해변따라 줄이 길게 처있었다. 속초해수욕장 입구까지 가보니 이쪽은 그나마 해변 앞쪽까지 갈 수 있었기에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집에서도 365일 바다를 보며 살고, 눈앞에서도 바다를 자주 마주치고 있다. 올 때마다 바다의 다양한 냄새가 2년의 시간 동안 후각에 조용히 각인되고 있다. 처음에는 좋아하는 바다니 그저 좋기만 했다. 마주침이 쌓일 수 록 바다의 색깔도 물결의 모양도 파도의 냄새도 단 한 번도 같지 않다는 걸 체득하고 있다. 여름 깜깜한 밤 보름달이 환한 하늘 아래 가을바람 타고 파도가 몰아치는 바다에는 다크 에일 맥주 맛이 강하게 느껴진다.
그래서였을까 집으로 가는 길에 아쉬워 해수욕장 바깥 주차장 입구 쪽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탁 트인 공터에 벤치가 4개 정도 듬성듬성 놓여 있었고 사람들은 없었다. 둘째 꼬맹이는 고맙게도 자고 있었고 이때다 싶어 맥주 캔을 땄다(4개 중에 다크 에일 맥주가 없었다 흑흑). 다크에일은 아니었지만 여름 밤하늘 아래 탁 트인 곳에서 마시는 맥주 한 모금은 언제나 꿀이다. 멀리서 바다가 보이면 더 좋고. 꼭 맥주가 맛있다기보다 맥주와 넘어가는 그 분위기를 좋아한다. 차를 타고 왔으면 결코 느끼지 못했을 맛이다. 슬리퍼를 질질 끌고서 동네 마실 가듯 골목을 누비고 바다를 마주하고서 벤맥(벤치에서 마시는 맥주)을 즐기며 그렇게 이 동네와 더 가까워진다.슬리퍼로 골목을 툭툭 차며 걷는 걸음이 쌓여갈 수 록 '그 동네'는 '나의 동네'로 바뀐다. 그게 몇 박 며칠의 짧은 여행지에서든, 몇 달 또는 몇 년 살고 있는 장기 체류지에서든, 새로 이사 온 동네에서든. 여행은 더 즐거워지고 삶은 더 생기를 가진다.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데 어느새 나머지 벤치에도 사람들로 채워졌다. 선선한 바다바람을 안주삼아 해변에서 마시지 못하는 맥주를 벤맥으로 즐기고 있는 모습을 보니 이렇게 우리 여름은 또 지나가는구나 생각이 들었다. 내년 여름에도 시원한 맥주와 바다와 함께 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