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가 마을에서 살게 된 이유

평일이 있는 삶

by 주하

하버드를 졸업한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다른 이들처럼 성공을 쫓지 않고 1845년에 월든 호숫가의 숲 속으로 들어갔다. 직접 통나무 집을 짔고 밭을 일구면서 소박한 자급자족 생활을 2년간 이어갔다. 고요한 숲 속에서 둘러싸인 자연이 선사하는 사계절을 친구처럼 여기고 그 우정을 즐기는 생활을 했다. 오직 육신의 노동만으로 생계를 유지했고 1년 중 약 6주일 간만 일하고도 필요한 모든 생활 비용을 벌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52주 중 6주를 제외하면 46주의 시간이다. 이 여유 시간에 그는 책을 읽고 사색을 즐기며 자신만의 철학을 탐구했다.

남들이 선망하는 명문대를 졸업한 그가 월든 호숫가 숲으로 들어간 이유가 무엇일까? 돈이 없이 살아보려 함도, 호화롭게 살아보자함도 아니었다. 소로우가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는 것은 얽매임이 없는 자유였다. 죽음을 맞이했을 때 헛된 삶이 아니길 바랐으며 그러기 위해서 그에게 삶의 본질이, 이를 구성하는 하루의 본질이 중요했다. 삶과 하루를 이루는 시간이 물질적인 부분보다 자신에게 소중했던 것이다.



20대에 1년간 보낸 호주에서의 느린 시간은 그곳에서 살고 싶다는 갈망을 불러일으켰다. 한국으로 돌아와 이민준비를 하려 했으나 갑자기 좁아진 이민문턱에 자신이 없다는 이유로 포기해 버렸다. 30대가 되고 새 직장에 다니면서 일을 시작했고 몇 년 뒤 결혼을 했다. 틈틈이 호주의 여유 있던 생활이 그리웠지만 이내 기억 속 한편으로 잊혔다.

연구원으로 일했던 남편은 야근이 잦았다. 우리 둘만 있을 때는 크게 문제 되지 않았다. 아이가 태어나 새 식구가 생기면서 퇴근시간이 미워지기 시작했다. 임신과 출산으로 일을 쉬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혼자 아이를 하루종일 보는 것은 버거웠다. 잠시도 눈을 떼지 않고 한 생명을 보살펴야 함은 생각 이상이었다. 남편에게 매일같이 "언제 와?"라고 물으며 유일한 공동양육자에게 매달렸다. 항상 늦어지는 퇴근시간에 그는 미안해했고 빨리 일을 끝내려고 어느 때보다 열심히 일했다. 프로젝트를 빨리 끝내면 일찍 퇴근하는 주간이 있을 줄 알았는데 그의 보스는 일을 잘한다며 더 많은 프로젝트를 그에게 던져주었다. 진급을 하고 월급이 올랐지만 행복하지 않았다.


낮잠을 곤히 자고 있는 아기를 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차장이 되고 월급이 오른 그는 분명 책임이 늘어나고 일도 더 바빠질 것이다. 하지만 아이도 자랄 것이고 손도 많이 갈 것이고, 나는 이렇게 힘이 드는데 이런 나를 보는 남편도 분명 지칠 것이고, 영원히 반복될 것 같은 악몽에 빠진 기분이었다.

우리 가족이 만족하며 살 수는 없을까? 이때 나에게 필요했던 것은 시간이었다. 잠시라도 숨을 돌리고 나를 돌보는 시간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가족의 평일과 주말까지 송두리째 집어삼키는 야근이라는 녀석과 결별했다. 11년 다닌 그의 첫 직장에서 퇴사한 것이다.



20대 초반에 월든을 읽었을 때는 그가 숲 속에 들어가 소박한 자급자족 생활을 일궈간 행위만이 눈에 들어왔다. 30대가 되어 결혼을 하고 부모님으로부터 독립적인 생활을 꾸려가면서 월든을 읽을 때면 행위보다 그가 월든으로 들어가게 된 이유가 보이기 시작했다.

9월이면 멀리 산과 호수 그리고 바다가 보이는 집에서 살게 된 지 이제 5년 차가 되어간다.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우리 가족이 바닷가마을에 살게 된 이유도 소로우와 크게 다르지 않다. 돈이 없는 생활을 하기 위해서도, 풍족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도, 자급자족하는 소박한 삶을 살기 위함도 아니었다. 우리가 바라던 것은 얽매이지 않은 자유였다. 풍족한 돈도 좋지만 그에 앞서 여유로운 시간이 우선이었다. 시간에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오롯이 소유하고 싶었다. 서로에게 찡그리지 않고 당연시 주어지는 정시 퇴근 시간. 촘촘하지 않고 여백이 있는 저녁의 일상. 느리게 흐르는 하루의 모습들.

원하는 시간을 위해 높은 월급을 내려놓았다. 주도적인 삶을 살 수 있는 자유를 쥐어주는 시간을 위해 보다 낮은 연봉을 선택했다. 9시 출근에 6시 칼퇴근이 이어지고 우리가 바라던 시간을 풍족히 소유하는 삶을 살고 있다.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다. 우리에게는 잃은 부분의 아쉬움보다 얻은 부분의 풍족함이 훨씬 크기에 만족하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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