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디자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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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말 많은 디자이너-1
그래서 뭘 디자인하세요? 미래를 디자인합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미래를 디자인한다. 그중에도 도시 공간이 나의 집중분야이다. 그리고 그 미래를 만들기 위한 과정을 디자인한다.
그게 무슨 말이냐하면, 미래와 과정을 디자인한다는 것은 때로는 목표를 새로 정하는 일 일수도 있고, 가능한 미래의 범위를 조사하는 일 일수도 있고, 혹은 각기 다른 이해관계자 사이에서 관점을 수집하고 조율하는 일 일수도 있으며 아이디어를 실험해보기 위해 프로토타이핑*을 만들어보는 일이기도 하다. 디자인한 것을 볼 수 있냐고 묻는다면, 공간 사진도, 앱디자인도 그래픽이나 전시도 아닌, 다이어그램과 ppt와 보고서, 그리고 포스트잇이 가득한 함께 일하는 사진이 나의 결과물이다. 한국에서는 이 부분을 ’ 기획‘의 영역이라고 하실 수도 있겠다.
*프로토타이핑 : 아이디어를 테스트하기 위해 시험 삼아 만들어 보는 일.
디자이너라고 하면, ‘그림 그리는 사람’이라고 한국이건 유럽이건 비디자이너에게 종종 인지된다. 틀린 말은 아니다. 설계 도면을 혹은 시안을 가지고 기술자에게 가져가는 것이 디자이너의 역할이다. 그러니 그림 그리는 사람 맞다. 그런데, 그림을 잘 그리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어떤 의도로 뭐에 사용되기 위해서 그림을 그렸냐는 가이다. 그래서 디자이너의 가장 표면적으로 보이는 역할은 그림을 그리는 일이다. 하지만, 디자이너의 진짜 역할은 그림을 주문한 사람(클라이언트)과 그림을 현실화하는 사람(기술자) 사이에서 가장 의도와 목적에 맞게 현실 가능성 사이에서 밀고 당기는 일이다. 어떻게 밀고 당기느냐가 디자이너의 창의력이 판가름 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디자이너의 ‘그림 그리는 능력’은 어떤 생각을 해서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그래서 어떻게 해야 그림이 목적에 맞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만들 수 있을지를 고려하는 것 모두 포함된다.
클라인트가 원하는 미래의 상이 분명하다면, 내가 하는 일은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클라이언트는 이것저것 많은 것을 보았을지는 몰라도 무엇이 앞으로 가능할지는 해보지 않고서는 알기가 어렵다. 현실화하기에는 예산과 현실 흐름과 맞지 않을 수도 있고 맥락에 맞지 않을 수도 있다. 이때 디자이너에게 현재 가능한 것과 가능성의 경계를 허무는 밀고 당기는 상상력과 현실 사이를 줄다리기하며 가까운 혹은 장기적인 미래에 새로운 가능성을 제안하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나는 디자이너로서, 트렌드를 조사하고 무엇이 트렌드를 만드는지를 분석하여 어떤 미래가 가능한지를 여러 디자인과 연구 기술을 이용하여 공유하는 일을 한다. 미래의 도시는, 이를 운영하는 미래의 조직과 직업은, 도시의 기본 단위인 미래의 가족의 형태는, 미래의 옷은, 미래의 먹거리와 그에 따른 운송 수단은 어떻게 생겼을까? 그 미래는 누구에게 영향을 미치게 될까?
클라이언트가 문제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분석하여 원하는 결과물이 이미 정해져,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에겐 건물이 필요해!‘라던가 ‘우리에겐 앱이 필요해’라고 이미 정확하게 알고 있고, 만든 결과물을 어떻게 쓸지 미리 다 안다면 내가 하는 일은 사실 필요가 없다. 하지만, 복잡한 도시 문제(물 문제, 집공급, 빈집, 탄소감축)는 이를 해결하는 데에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바로 알기가 어렵다. 집을 지어야 하는데 물이 부족해서 집을 공급할 수 없다면 무엇을 만들어서 누가 해결해야 하는가? 혹은 지역 경제가 위축된다면 누가 어떤 책임을 지고 무엇을 만들어야 하는가? 문제도 모호하고 이를 해결해 줄 결과물도 모호하다.
이런 일은 수도 전문가 혹은 정책 전문가 같은 전문가가 나서서 해결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물을지도 모른다. 한 분야의 전문가가 이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내가 하는 일은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이 모이면, 각자의 우선순위로 각자의 언어로 각자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문제를 분석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있고, 모두가 기대하는 미래의 상도 다르며, 같은 것을 지칭하더라도 전문 분야에 따라서 용어도 관심사도 책임도 다 다르다. 이 과정에서 서로의 문제점을 함께 이해하는 언어로 소통할 방법을 찾고,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공동의 해결 목표를 정하는 것 없이는 협력도 문제를 개선하는 것도 어렵다. 집을 지어야 하는데 물이 부족해서 집을 공급할 수 없을 때, 부동산 개발자와 건축가는 집을 지을 때 공급하는 파이프와 물과 관련된 공급 자제와 물을 흡수하는 녹지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동시에 녹지는 우선순위가 되기는 어렵다고 덧붙인다). 수도를 제공하는 수도 관리 회사는 파이프 시스템에 집중한다. 하지만 물이 없는 이유는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는 기후 문제이기도 하고 녹지가 적은 도시 계획과 도로 계획 문제이기도 하고, 시민들이 물에 관심이 없어 정치인들도 예산편성 시 우선순위에 두지 않아서 이기도 하다.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문제이지만, 모두에게 피해되는 일은 어떤 전문가가 나서야 하는 것일까?
이런 맥락에서 내가 하는 일은, 미래의 가능성을 조사하고, 여러 관계자들의 의견들을 듣고 입장을 서로 조율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언어를 정리하는 역할을 한다. 이때 그래픽, 스토리텔링, 워크숍, 데이터, 인터뷰, 프로토타이핑 등을 활용하기도 한다. 그리고 공감하는 변화를 만들기 위해서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누가 어떤 역할을 언제 하면 좋을지 과정을 만들기도 한다. 사람들의 의견을 수집하는 일을 하기도 하고, 이야기 만드는 기술로 모두가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접근 방식을 찾기도 한다.
이것이 여전히 ‘디자인’이냐고, 한다면, 나는 그렇다고 하겠다. 디자인 결과물을 바꾸기 위해서는 그 결과물을 예상하는 미래상과 과정 또한 의도에 맞게 디자인할 필요가 있다. 이 없이, 디자인 결과물에만 집중하는 ‘디자인’에는 의도와 목표를 실현하는 데에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미래와 과정에 집중하는 디자인을 한다.
이 둘의 이미지 중 어떤 과정이 더 나은지를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각기 장점이 있다. 그리고 하나만 취하기 보다는 둘 다 활용하는 경우가 더 많다. 다만, 무엇을 위한 디자인인지를 묻는 일이 내가 하는 디자인의 시작이다. 아무튼 그런 디자인을 한다. 말이 많아지는 일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