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안의 미술관
그림책을 처음 좋아하게 된 건 간결한 스토리에 담긴 위로의 말 덕분이었다. (주로)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그림책에 나쁜 의도의 메시지를 담는 사람은 없다. 가족의 사랑, 친구와의 우정, 감정을 알아채고 다스리는 법 등 하나의 그림책은 언제나 하나의 주제를 다루고 있다. 우리가 쉽게 잊어버리는 것들. 아이들에게 가르쳐주면서도 정작 우리는 행하지 못하는 것들. 그런 것들을 그림책은 일깨워준다.
그런가 하면, 그림책을 오래 좋아하게 만드는 힘은 그림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그림책을 텍스트만 놓고 보면 보통 1분, 길어봤자 3분 이내에 읽을 수 있다. 그림책을 완성시키는 것, 시선을 오래 머물게 하는 것은 역시 그림이다.
『뒤죽박죽 농장의 비행사들』이라는 그림책을 예로 들어보자. 이 그림책은 농장 동물들이 졸리 아저씨를 도와 성공적으로 비행기 에어쇼를 마친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일단, 앞표지부터 감상한다. "귀여워-!"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것을 참고 사뭇 진지하게 앞으로 어떤 일들이 펼쳐질지 예상해 본다. 그 제목에 걸맞게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농장에 있어야 할 동물들이 비행기를 타고 어딘가로 날아가고 있다. '뒤죽박죽'이라는 제목의 단어처럼, 비행기 옆을 나는 비둘기 중 한 마리는 거꾸로 하늘을 날고 있다.
이제 본격적으로 그림책 읽기에 들어간다. 먼저, 텍스트를 읽는다. 졸리 아저씨가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아 뒤죽박죽 농장이 엉망이 되어버렸다는 텍스트를 읽으며 전체적으로 그림을 훑어본다. 맥락을 이해한 후에는 다시 한번 그림을 살핀다. 같은 내용이라도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그림이 나올 수 있다.
아무도 데려오지 않아 울타리 밖에 남겨진 양은 울타리 사이로 얼굴을 내밀고 있다. 오리 두 마리는 굳건히 잠긴 자물쇠를 바라보고 있고, "이건 내 밥이 아니라고!" 외치는 젖소 앞에 깨알같이 닭 그림이 그려진 사료가 놓여 있다. 동물들의 얼굴에 큰 표정 변화는 없다. 하지만 대사 때문일까, 멀뚱히 서 있는 모습에서 그들의 황망함이 느껴지는 듯하다.
그림 기법도 살펴본다. 색연필을 사용한 듯한 그림은 색을 단순히 칠하는 대신 여러 색을 조합한 패턴을 반복해 질감을 만들고 있다. 태양은 흰 부분을 그대로 동그랗게 남겨두고 주변을 노랗게 칠하는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고, 햇빛이 새벽 어스름을 몰아내는 장면은 하늘의 파란색과 노랑이 적절히 섞여 있는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다. 속으로 그림을 따라 그려보며 이 작업이 얼마나 독창적인지, 또 얼마나 반복되는 고된 작업일지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귀엽고 재밌는 깨알 요소다. 졸리 아저씨 몰래 작당모의를 하는 동물들이 숨어서 아저씨를 지켜본다. 오리 한 마리는 나무 뒤에 숨은 것도 모자라 나뭇잎으로 우거진 수풀 사이에서 거꾸로 고개를 내밀고 있다. 또, 막 비행을 하려는 찰나 오리들은 목에 언제 꼈는지 모를 비행 고글 하나씩을 걸고 있다.
나는 특히 이 깨알 요소가 많은 그림책을 좋아한다. 예를 들어, 동물들이 주인공이라면 동물들의 크기에 따라 각각 다른 크기로 위치한 문이라거나, 작은 동물이 눈을 흘기고 있는 표정, 제스처, 소품 같은 것들. 신경 쓰지 않으면 모르고 넘어갈 수도 있지만 관심을 갖고 꼼꼼히 읽으면 발견할 수 있는 요소들. 작가가 콩알같이 그린 요소들을 깨알같이 발견하고 미소 지을 때는 작가와 비밀스레 내통하는 기분까지 든다.
그렇게 때로는 감탄을, 때로는 킥킥대며 웃기를, 때로는 귀여움에 혀를 악 깨물며 그림책을 읽다 보면 10분이 훌쩍 간다. 10분이라면 보통 책 한 권 읽는 시간이라기엔 짧고, 전시장을 가려고 집을 나섰다면 아직 길바닥에 있을 시간이다. 그런데 나는 그 시간 안에 스토리 하나를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고, 그림을 감상하고, 때로 교훈까지 얻는다.
작품을 보러 미술관에 갈 필요 없이, 그림책 한 권만 펼치면 미술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나에게 그림책은 하나의 세계관, 이야기, 그림 작품들을 담은 종합문화예술이자 미술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