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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엄 Mar 08. 2023

잊고 싶지 않은 이야기


추위가 채 가시지 않은 초봄 밤의 책방에서 그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로마 테라피스트가 되고 싶어서 해외로 유학을 떠나려고 했던 사람이 있었는데, 계획이 좌절되고 주저앉으며 그대로 몇 년간 우울증을 앓았다는 이야기. 그때부터 6년이 넘는 시간 동안 아로마 오일이 담긴 상자를 열어보지 못했다는 이야기.


그 마음을 아는 한 친구는 끈질기고도 기분 나쁘지 않게 그녀를 설득해 마침내 아로마 오일이 든 상자 앞에 서게 했습니다.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나무상자를 떨리는 손으로 훑을 때 그녀는 환하게 웃었고, 온몸에서 젊은 날 미처 다 펼치지 못한 사랑과 설렘, 반짝거림이 뿜어져 나왔다고 하네요. 친구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자신의 심장까지 약동하는 느낌이었다고 나중에 전했습니다.




그 향과 사랑이 얼마나 강렬했던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낯설게 자리한 저에게까지 전달되는 듯했습니다. 순간 전율이 일었지요.

 

그리곤 모두에게 자신만의 나무상자가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끝난 사랑, 중단된 기록, 갑작스레 잘린 단면 같은 것들이 담긴 상자가요.


성악을 공부하러 이탈리아에 왔다가 한인민박을 운영하게 되었다고 말하던 사장님에게서, 피렌체 미술관에서 예상과 달리 그리 기뻐하지 않던 우리 어머니, 넷이나 되는 자녀를 낳고 기르느라 한동안 펜을 놓아 그림 그리는 법을 잊었다던 어머니에게서 어렴풋이 느낀 것의 형체를 이제 알아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건 다름 아닌 나무상자였던 것입니다.  




한참이 지나고서야 다시 빛을 보게 된 아로마 오일들은 상자가 열리면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품었던 향을 멀리까지 뿜었다고 합니다. 있던 바로 그 자리에서요.


그녀는 다시 아로마 테라피 공부를 조금씩 시작했고, 우리 어머니도 놓았던 붓을 다시 잡았습니다. 상자를 다시 바라볼 용기만 있다면 충분하더군요. 예전의 원대한 꿈 따위 없어도 그때의 사랑만 있다면, 상자 속 그것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기다리고 있었을지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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