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cm와 장기하
어렸을 때 바둑학원에 다녔다. 학생들을 태우고 학원으로 향하는 원장님 차에서는 내내 <보랏빛 향기>가 흘러나왔다. 내가 기억해서 부른 첫 번째 가요였다.
초등학생 때는 원더걸스나 빅뱅, 소녀시대 같은 2세대 아이돌이 대거 등장했다. 소녀시대와 원더걸스 중 누가 최고의 걸그룹인가를 주제로 열리는 열띤 토론을 이해하고 싶어서 음악을 들었다.
처음으로 팝송을 들은 건 중학생 무렵, 영어 공부를 하기 위해서다. 웨스트라이프의 <You raise me up>, 제이슨 므라즈의 <I'm yours> 같은 유명한 팝송을 들으며 영어를 귀에 익혔다.
당시에는 유튜브가 없었다. 멜론이나 지니 같은 음원 사이트에서 곡을 구매해 듣기에는 부담스러웠다. 네이버나 다음 팟 플레이어를 통해 누군가 올려준 음악을 한 곡씩 듣거나, 외국 사이트에서 제공되는 음원을 들었다. 한 곡을 찾아 듣는데 더 많은 시간이 들었지만 그 과정에서 몰랐던 곡을 알게 되기도 했다.
음악을 듣거나 팝송의 해석을 찾기 위해 주로 네이버 검색창을 이용했다. 네이버 블로그 중에는 리스너들이 음악을 한 곡 한 곡 올리며 짧게 주석을 다는 곳들이 있었다. 그들이 소개하는 음악을 하나하나 수집했다. 전주 3초, 하이라이트 부분 5초만 들으면 내 취향의 음악일지 감이 오기 시작했다.
어느 날 한 블로그에서 10cm의 <아메리카노>를 들었다. 흔하지 않은 제목에 오묘한 가사, 경쾌한 멜로디에 빠져들었다. 주변 누구도 10cm를 알지 못했던 때였다. 남들이 이름조차 모르는 보석을 길에서 주운 것 같이 두근거렸다.
그러던 어느 날, 무한도전 방송을 보던 중이었다. '무한도전 가요제'에 올해는 어떤 가수들이 등장할지 관심 있게 지켜보던 중 대표곡 <아메리카노>와 함께 '10cm'가 등장했다. 듣는 귀는 모두 똑같은지, 십센치는 무한도전 등장 후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다.
어제까지는 나만 흥얼거리던 노래라고 생각했는데 자고 일어나니 모두가 흥얼거리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이 잘 모르는 좋은 것을 나는 알고 있다는 야릇한 감정은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홍대병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이 덕분이었을 것이다.
홍대병 대신 더 값진 것을 얻었으니, 아직 알려지지 않은 보석 같은 음악들이 많겠구나 하는 확신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인디밴드의 음악을 들을 때 '유명하지 않아서 별 볼 일 없는 음악'이 아니라 '엄청난 매력을 가진 숨겨진 음악'을 듣는다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인디'는 영어 단어 'Independent'의 약자로 상업적인 거대 자본에 기대지 않고 활동하는 것을 말한다. 인디밴드란 말하자면 주식 차트를 오르내리는 엔터테인먼트 회사가 아니라 방구석에서 음악을 시작한다는 뜻이다. 제3자에 의해 구성된 멤버 대신 인맥과 부탁과 우연으로 어찌저찌 동료를 구한다는 뜻이고, 음악중심 무대에 서는 대신 홍대 클럽에 선다는 뜻이다.
이제는 대중음악 씬에서 더 자주 이름이 오르내리는 장기하도, 혁오도, 잔나비도 인디밴드다. 이렇게나 유명해진 밴드를 인디밴드라고 부르는 것이 맞을까 혼자 고민해 본 적이 있다. 그런데 장기하 씨를 보자. 유명해져서 하루는 라디오 스타에 나왔다가도 다음날에는 합정역 근처의 라이브 카페 '제비다방'에서 공연을 한다. 얼마나 유명해졌든 음악을 대하는 방식이 영락없는 인디밴드라면, 인디밴드로 남는 것이 아닐까.
유명세가 전부는 아니지만 먹고사는 문제를 외면할 수는 없으니까. 좋은 음악을 하는 인디 아티스트들이 딱 맞는 취향을 가진 사람들에게 많이 발견되었으면 좋겠다. 유튜브 뮤직과 스포티파이 알고리즘 가라사대, 새로운 음악에 마음을 열고 있으면 좋은 음악이 찾아오는 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