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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혹의 우뇌 Dec 31. 2016

"Planet B는 없다"

프롤로그 - 유엔 기후리더십 10년, 그리고 대한민국

불가능한 직업


무대는 1953년 4월 9일, 뉴욕의 아이들와일드 (Idlewild) 국제공항 (현 John F. Kennedy 국제공항). 유엔 초대 사무총장이었던 노르웨이 출신의 트리그베 리에 (Trygve Lie)는, 그의 후임 제2대 사무총장 다크 함마르셸드 (Dag Hammarskjöld)에게 첫인사를 건넸다.


“환영합니다, 함마르셸드. 이제 세상에서 가장 불가능한 일을 맡게 되었군요 (Welcome, Dag Hammarskjöld, to the most impossible job on this earth).”


의미심장했던 이 인사는, 2016년이 가기 하루 전인 지금도 유효하다.


사실 그간 국제사회가 유엔 사무총장이라는 직무에 부여한 몇 가지 별명을 살펴보면, 트리그베가 이야기했던 ‘불가능’이란 말의 의미를 쉽게 헤아릴 수 있다. 국가 간의 어려운 문제를 중재하는 역할을 맡아야 하지만, 그 문제들을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만큼의 권위나 권한이 없고 쉽게 질타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붙여진 ‘희생양 (scapegoat)’혹은 ‘독배 (poisoned chalice)’, 바티칸 가톨릭 교황처럼 도덕적 권위를 가지고 말하지만 실제 힘은 미약하기 때문에 붙여진 ‘세속 교황'. 냉엄한 국제정치의 현실 앞에 유엔 사무총장이라는 '직(職)'이 얼마나 어렵고 ‘제한적’인지 내포하고 있다. (참고문헌: "유엔 사무총장" (김정태, 살림 2007))


지난 2006년 “단군이래 최고 경사” (연합뉴스 2006년 10월 10일, "한국인 유엔 首長탄생에 일제 환호")라며 유엔 사무총장 당선을 모두 환호하고 자축했던 우리는 (유엔 사무총장을 배출한 국가는 노르웨이, 스웨덴, 미얀마, 오스트리아, 페루, 이집트, 가나, 한국, 포르투갈 (제9대 예정)), 이제 반기문 총장의 퇴임을 앞두고 반으로 나뉘어 복잡한 심경을 드러내고 있다. 그의 국내 정치에의 적합성, 다각도의 검증 등을 논하며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그를 평가하기 전에, 우리는 우리가 그렇게 자랑스러워했던 한국인 출신 유엔 사무총장의 퇴임, 그리고 그간의 성과를 적어도 한 번쯤은 차분하게 숙고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반기문 총장의 유엔 사무총장직 수행은 개인의 영광이었기도 하지만, 국제사회에서 개도국과 선진국을 잇는 "가교 역할(bridgebuilder)"을 수행할 수 있는, 50년 만에 원조 수혜국에서 공여국으로 탈바꿈한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즉 우리 모두의 외교적 영광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한국인 출신의 리더가 주축이 되어, 국제사회의 지식인들과 전문가들로 구성된 팀을 이끄는 가슴 벅찬 일이기도 했다.


실무자로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당선이라는 상징적인 사건과 그 존재 자체가, 외교관들은 물론이겠거니와 국제개발협력 분야에 젊음을 걸었던 한국인 후배들에게 얼마나 큰 의미와 자신감으로 다가왔는지는 굳이 이야기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현재 반기문 총장의 공과에 대한 논리적인 접근보다는, 동양인 특유의 겸양과 겸손의 리더십 스타일에 대해 비난하는 서양 언론의 평가를 그대로 번역 (혹은 오역해) (다분히 정치적인 의도를 가지고) 혹평을 하는 글을 읽을 때마다 아쉬움을 금할 길이 없다.


물론, 유엔 사무총장이라는 직분과 국내 정치인, 그것도 대선주자의 신분으로서의 덕목은 엄연히 다르다. 그러니 더욱 반기문 총장에게 국내 정치인/차기 대선주자라는 잣대를 들이대어 평가하기 전, 유엔 사무총장으로서의 그의 업적을 명확히 집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그중 필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지난 2015년 12월 제21차 유엔 기후변화 당사국총회에서 채택된 파리 기후변화 협정 (Paris Agreement)이다.


파리 기후변화 협정의 외교적 의의


파리 기후변화 협정은 지구의 평균 온도가 산업화 이전 대비 섭씨 2도 이상 상승하지 않도록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이는 것을 목표로,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이 온실가스 목표치를 함께 제출해 이행하기로 합의한 협정이다. 1997년 채택된 교토의정서가 선진국에만 구속력을 부여했던 것과 달리, 이번 협정은 197개 당사국 모두가 자발적 목표치(Nationally Determined Contribution: NDC)를 제출하고 의무적으로 준수해야 한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파리협정은 전 세계 온실가스 배출량의 55%를 책임지고 있는 최소 55개국이 비준해야 발효된다는 조건하에 체결되었으며, 이 조건이 충족되며 2016년 11월 공식 발효됐다. 현재 총 197개국 중 120개국이 협정을 비준했다.


이 협정은 하루아침에 생긴 성과가 아니다. 지난 10여 년간 꾸준하게 추진되었던 유엔의 기후변화 외교의 결과물이다. 코스타리카 출신의 전 유엔 기후변화 협약 (UNFCCC) 사무총장 크리스티나 피게레스 (Christiana Figueres), 전 유엔 환경계획 (UNEP) 사무총장 아킴 슈타이너(Achim Steiner)가 집필한 "No Planet B: Ten years of climate leadership"에 따르면, 지난 10년 동안의 기후 외교의 집약체인 파리 기후변화 협정 자체가 "다자주의가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성과(crowning achievements of multilateralism)"라고 자평하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필자도, 국제사회의 전문가들과 언론도 크게 이견이 없다.


사실 반 총장과 유엔팀은 지난 2007년 부임 이후 기후변화 이슈를 유엔의 주요 어젠다로 상정하는 데 오랜 기간 동안 전략적 노력을 기울였다. 기후변화 이슈는 그가 유엔이 전통적으로 전쟁 및 평화 관련 이슈에 집중하는 것을 탈피해, 새로운 다자주의의 패러다임을 정립하려는 의도와도 일맥상통하는 주제였다. 그는 2007년 1월 16일 부임한 지 2주 만에 가졌던 부시 미국 대통령과의 면담에서 수단 다르푸르 사태, 북핵문제와 함께, 기후변화 이슈를 긴급 어젠다로 격상시키고, 그해 11월에는 남극을 방문해 "우리가 무언가 하지 않는다면 가까운 시일 내에 빙하가 없어질 것 (all this may be gone, and not in the distant future, unless we act, together now)"이라고 국제사회에 경종을 울리며 그의 기후리더십 시대를 예고했다.


2007년 사무총장 부임 첫 해, 빙하가 녹고 있는 남극을 방문한 반기문 사무총장 (사진출처: 유엔 공보국)


그러나, 기후 외교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2012년 만료되는 교토의정서 이후의 체제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선진국과 개도국의 입장 차이로 여러 가지 어려움에 직면했으며, 상징적으로 코펜하겐에서 열린 제15차 당사국 총회가 명확한 목표치와 구속력이 없이 종료되었을 때는, 글로벌 환경 다자주의 외교의 종언이라고까지 폄훼되기도 했다. (참조: 왜 코펜하겐 회의는 실패했는가? (BBC 뉴스 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엔은 저개발국/개도국을 설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장치를 고안하고 선진국들을 설득했다. 실례로 2020년까지 1,000억 달러를 기후변화 적응 (adaptation) 및 감축 (mitigation)을 위해 개도국에 투자하는 계획을 추진하며, 그 이행기구로 녹색기후기금 (Green Climate Fund)를 송도에 유치하는 등의 성과를 냈다. 무엇보다 민간부문 리더들을 기후변화 협상에 참여시키며 외연을 넓히고, 특히 중국/인도와 미국의 동참을 이끌어 내며 결국 파리협정을 이뤄내는 데 성공했다. (물론 트럼프 차기 미국 대통령과의 협상은 이제 새로운 유엔의 과제로 남아있다.) 지난 10년간 수많은 위기에 직면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던 유엔의 기후 리더십은, 지난 유엔 10년의 성과, 역사적인 자산으로 명확하게 인식해야 할 부분이다.


제21차 유엔 기후변화 협약 당사국총회에 참석자들이 파리기후변화 협약이 채택되자 환호하고 있다. (사진출처: Stockholm Environment Institute)


한국, 기후변화 대응의 리더인가 악동인가?


그러나 우리나라의 현실은 쉽지 않다. 2008년 대통령 직속으로 추진했던 녹색성장 리더국가로서의 추진력은 퇴색됐다. 기후변화를 유엔 아젠다의 전면에 내세웠던 반기문 사무총장의 모국이라는 사실에 걸맞은 수준도 아니다. 국회는 지난 11월 '기후변화에 관한 파리협정 비준동의안'을 본회의에서 통과시키며, 유엔에 파리 협정 비준서를 기탁했다. 우리나라는 2030년까지 배출전망치(BAU) 대비 온실가스 배출을 37% 자발적으로 감축하겠다(NDC)고 국제사회에 약속했으나, 이에 대해 국제사회는 사실상 2020년 온실가스 감축목표 보다도 낮은 수준으로, 2030년에 1990년 기준으로 81% 더 배출하겠다는 목표라며 혹평하고 있으며, 아직 이를 어떻게 이행하겠다는 구체적인 계획 조차 미비하다.

한국은 2016년 석탄화력발전소 증설, 감축량 하위조정 등으로 기후행동추적(Climate Action) 분석에 따라 '기후악동'으로 분류되었다. (사진출처: 한겨레)


정부는 제1차 기후변화 대응 기본계획 및 2030 국가온실가스 감축 기본 로드맵을 확정해, 2030년까지 발전, 사업, 건물 등 8개 부문에서 온실가스 2억 1,900만 톤을 감축하기로 목표를 세웠다. 산업계의 부담은 37% 중 12%로 제한됐지만, 산업부문에서 줄인 부담을 다른 분야로 전가하는 것에 대한 구체적 계획도 부족하다(참고문헌: "파리 기후변화 협정의 국회 비준 동의 II: 국회의 세부 점검과제" (이혜경, 국회 입법조사처 2016)).

37%의 감축량 중 11.3%는 국제시장 메커니즘을 활용하겠다고 했지만, 이에 관련해서도 구체적인 계획이 없다. 게다가 지난해 발표된 제7차 전력수급 기본계획에 따라 2025년까지 석탄화력발전소 20기가 추가 건설될 예정이다. 제22차 당사국총회 전 실시된 민간연구소 기후행동 추적(CAT)은 사우디아라비아, 호주, 뉴질랜드와 함께 한국을 기후변화 대응에 가장 무책임하고 게으른 기후 악동(climate villain) 국가로 선정하기도 했다. 기후변화와 녹색성장의 문제는 전 지구적인 문제이며, 정권과 상관없이 우선적으로 추진되는 문제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현 정부에서는 우선순위에서 밀려나며 동력을 잃었다. 시급한 것은 범정부 협의체인 녹색성장위원회의 대통령 직속체제로의 격상, 국내 파리협정 이행계획의 세부 점검, 국제시장메커니즘을 통한 감축분인 11.3% 달성을 위한 아이디어 개발 및 개도국 시범 프로젝트 추진,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간 국가전략을 통해 투자한 국내 국제기구의 적극적 활용, 민간의 기후금융 재원 마련을 위한 혁신적 비즈니스 모델 개발 등이다.


분명한 점은, 기후변화 대응, 녹색경제/녹색성장 등의 주제는 다시 적극적으로, 그리고 정부 교체와 관련 없이 지속적으로 추진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또한, 전 세계 기후변화 이슈를 지난 10년간 총괄하며 기념비적 성과를 냈던 반기문 총장과, 그가 보유한 국제사회 최고의 전문가 네트워크를 통해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이다. 차기 정부에서 반기문 총장의 역할이 어떤 것이든 상관없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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