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르헤스와 시지프스 신화를 통해 읽는 오늘, 내일, 그리고 새 해
아르헨티나의 시인, 수필가, 소설가이자 "20세기의 도서관", "사상의 디자이너"라 불리는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그는 인생에서 가장 원하던 것을 얻는 순간 나락으로 떨어졌다. 국립 도서관장이라는 생애 최고의 영예를 얻는 순간, 앞을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누구도 눈물이나 비난쯤으로 깎아내리지 말기를.
책과 밤을 동시에 주신 신의 경이로운 아이러니,
그 오묘함에 대한 나의 허심탄회한 심경을
신은 빛을 여읜 눈을 이 장서 도시의 주인으로 만들었다.
여명마저 열정으로 굴복시키는 몰상식한 구절구절을
내 눈은 꿈속의 도서관에 읽을 수 있을 뿐……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축복의 시 –마리아 에스떼르 바스께스에게” 중
2017년 새해가 눈 앞이다. 우리는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현재를 희생하고 인내하라는 논리에 익숙해왔다. 그러나 우리의 힘으로 예측할 수 없는 삶의 궤적을 감안한다면, 그것은 그리 현명한 논리가 아닌지 모른다. 그렇다고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는 언제 눈이 멀지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으로 국립 도서관장이라는 삶의 목표를 포기할 수도 없다.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 신화>는 결국에는 항상 굴러 떨어지는 바위를 산꼭대기에 옮겨놓으라는 처벌을 받은 시지프를 통해, 인간의 모든 일이라는 것이 결국 정상에서 다시 굴러 떨어질 수밖에 없는 돌이라는 것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끊임없는 바위를 밀어 올리는 데 온 힘을 쏟는 시지프는 허망하고 쓸데없는 짓인 줄 알면서도, 다시 돌을 들어 정상으로 향하는 인간 문명을 상징한다. 결국에는 굴러 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다시 정상으로 달려가는 것이 인간의 삶인 것이다.
그렇다고 인간의 행위가 모두 무의미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전력을 다하는 데 인간 삶의 아름다움이 있다. 돌을 올리기 위해 감내해야 할 고통 그 자체를 통해 우리는 살아있다는 뜨거움을 느낄 수 있다. 그러니, 전력을 다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내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삶을 찾아가는 것이 인생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만큼 부조리하고 안타까운 인생도 없다.
내일이면 또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된다. 우리의 오감은 현실에서 벗어나는 영화 같은 반전을 꿈꾸지만, 그런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건 오로지 현재, 오늘의 나밖에 없다.
시인 윤동주는 "내일은 없다" 에서 “새날을 찾던 나는 잠을 자고 돌보니 그때는 내일이 아니라 오늘이더라”며 “내일은 없나니”라고 했고, 홍영철 시인은 "그 많던 내일은 다 어디 갔을까"라는 시에서 “내일은 언제나 오늘이 되었고 오늘은 언제나 인내처럼 쓰고 상처처럼 아렸다”고 했다. 결국, 우리는 오늘 두 발 딛고 서 있는 그 자리에서 전력을 다 해야 내일이라는 꿈을 이룰 수 있다.
동시에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현재의 내가 어떠한들 오늘 자체를 즐기며 행복해하지 못한다면, 내일도 결코 즐겁거나 행복할 수 없는 것이다. 꿈을 이루자마자 시력을 상실하게되는 아이러니컬한 인생의 사건을 마주한 보르헤스의 시를 우리가 "축복의 시"라고 불러야 하는 이유다.
참고자료
[1]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열기>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우석균 옮김/ 민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