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롬비아의 평화협정
비오는 일요일 오후, 보고타 한 복판 7번 도로 70번대 길. 미국국제개발처(USAID) 사무소장과 팀이 있다는 레스토랑에 들러 맥주나 한 잔 하러 가는 길이었다. 달리는 차창 너머로 고위층 인사들이 자주 방문한다는 엘 노갈(El Nogal Club)이 보였다. 상류층의 클럽 같은 곳이었다. 건물이 좋다고 하는 내게, 운전을 하던 회사 동료 후안이 한숨쉬며 말했다.
“한 10여 년 전에 저 건물 폭파됐었지. 저거 전부 새로 지은 거야. 게릴라들에게 거액을 받은 사람이 주차장에 폭탄을 놓고 나오기로 했는데, 그 사람이 미처 나오기 전에 게릴라들이 폭파 단추를 눌러버렸지. 벌 받은 거지. 내 친구는 5분 전에 나와서 살았어. 많이 죽었지. 많이.”
콜롬비아로 간다고 했더니 지인들은 안전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구 반대편 안데스 산맥에 위치한 이 나라에 대한 이미지는 고작 마약 거래, 파블로 에스코바르, 나르코스, 무장반군 FARC/ELN, 심지어는 1994년 월드컵에서 자살골을 넣고 살해된 축구선수에 대한 기억 등 부정적인 이야기들 뿐이었으니 말이다.
올해 4월, 콜롬비아 나링요(Narino) 주 투마코(Tumaco)의 코카인 재배 산업을 취재하러 국경을 넘은 에콰도르 기자 두 명과 운전기사가 납치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콜롬비아 평화협정은 체결되었지만, 이행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넷플릭스(Netflix)의 히트작, 나르코스(Narcos)를 보면 콜롬비아 내전의 역사가 얼마나 잔혹했는지 알 수 있다. “파리 목숨”이라는 표현을 말 그대로 이해할 수 있을 정도다. 물론 드라마에는 극적 효과가 가미되었겠지만, 탱크가 법무부 계단을 오르며 건물을 파괴하는 장면, 항공기 폭파사건 등에 관해서는 실제 뉴스클립을 활용했다.
사망자 22만 명, 강제이주자 5백70만 명, 실종자 2만5천명.
콜롬비아 내전은 이렇게 무시무시한 숫자를 남겼다. 다른 나라와의 전쟁도 아닌데 말이다. 이 정도면 콜롬비아인들에게 뿌리 박힌 아픔과 분노를 이방인의 시각으로 감히 헤아리기 쉽지 않다.
1960년대부터 시작된 내전, 그리고 1990년대부터 정부와 게릴라 그룹 사이에 평화 논의가 시작된 이래 처음 체결된 협정은 2003년도에야 맺은 콜롬비아통합자위대(AUC)와의 협정이었다.
이 협정으로 민간이 조직한 3만 5천 명 규모의 군대가 해산되었다. 사실, 이들은 콜롬비아무장혁명군(FARC)이나 민족해방군(ENL)처럼 반정부 게릴라라기보다는, 이들 반정부 게릴라 그룹들을 상대하기 위해 조직된 단체에 가까웠다.
그 이후, 쿠바 하바나에서의 4년 간의 지난한 협상 끝에, 2016년 12월에 콜롬비아 정부는 FARC와 평화협정을 맺었다. 핵심은 FARC를 공식 정치단체로 인정하는 것이었다. 이 협상 끝에 FARC는 모든 무기를 정부에 반납했다. 협정 수립에는 난관이 많았다. 국민투표 후 나라는 반으로 갈라졌고, 실제 협정의 이행은 2017년 중반에서야 시작됐다.
협정을 주도한 산토스 대통령은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이 결과 7,000여 명이 무장해제됐다. 근래 콜롬비아는 지난 40년간 가장 낮은 살인율을 겪고 있다. 테러공격, 납치 등이 현저히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미래지향적인 선택이었지만, 많은 이들이 피눈물을 삼켜야 했던 것도 사실이다.
콜롬비아 정부와 FARC 사이에 체결된 하바나 평화협정(Havana Peace Agreement)에는 6가지 중요한 주제가 있는데, 이는 통합적 농촌개혁, 반군 세력의 정치참여, 적대적 행위 중단, 불법 작물재배 대안 마련, 희생자 대우, 실행 및 검증 메커니즘 수립이다.
협정의 내용은 미래지향적임에 분명했다. 왜냐하면 분쟁의 중단 자체를 천명함은 물론, 분쟁의 근본 원인을 통합적으로 제거하자는 데 뜻을 모았기 때문이다.
사실, 콜롬비아의 내전을 근본 원인을 이해하려면 다양한 사회 정치적 이해가 필요한데, 뿌리 깊은 불평등, 지도층의 부패, 권력 남용은 불평등한 토지분배 시스템, 불법 코카인 재배, 불법 금채굴, 산림파괴 등의 결과를 낳았다.
예를 들면, 2016년 콜롬비아 기획부의 자료에 따르면, 전체 인구 중 0.4%의 부유층이 46.5퍼센트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고, 67%를 차지하는 소작농이나 중하위 계층은 4.2퍼센트 만을 소유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낮은 분배율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캐리비안과 퍼시픽 해안가, 안데스 산맥, 오리노키아 평원, 아마존 산림으로 이루어진 국토의 지역적 특성상, 콜롬비아의 내전과 전후 재건 문제는 환경 문제와 밀접한 관계를 띠고 있다는 점이다.
무차별적인 농지 확대의 결과로 1990년부터 2015년 사이에 650만 헥타르에 달하는 산림지역이 소실되었고, 2016년만 해도 17만 8천여 헥타르의 산림이 소실되었다.
아직까지 콜롬비아에서는 주인이 없는 땅에 경제활동을 시작하면, 일정 기간 이후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데, 이 규정이 산림파괴와 무분별한 가축 방목을 부추기고 있는 것이다.
또한 2015년 자료에 의하면, 산림소실의 31 퍼센트가 불법 코카 작물 재배와 연관이 있다. 지난 35년 동안 원유 채굴지역은 2575번이나 공격을 당했으며, 이로 인해 410만 배럴이 유출됐다. 60%의 강이 원유 유출과 불법 광업으로 인해 오염되었다. 아직도 콜롬비아 수출의 87%는 원유와 석탄에 집중되어있다.
산토스 대통령은 퇴임 전 녹색성장 정책을 채택하며, 천혜의 자연환경을 해치지 않으면서, 오히려 자연자본(natural capital)을 최대한 활용하는 바이오경제, 산림경제 등의 본격적인 추진 발판을 마련해 놓았다. 녹색성장의 이행은 결국 재건 지역의 일자리 창출에도 기여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FARC와의 평화협정은 체결되었지만, 이행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ELN 등의 잔류 반군들과의 문제도 남아있다. 대선 기간 동안 이반 두께(Duque)가 이끄는 우파와, 페뜨로(Petro)의 좌파는 하바나 협정 이행 방식에 있어서도 의견 차이를 보였다.
이제 지난 8월 7일 공식 취임한 두께 행정부가 얼마나 초당적으로 평화협정을 이행할지, 그리고 그에 더해 녹색성장이라는 시대의 화두이자 국가의 비전을 어떻게 실행할 수 있을지가 초미의 관심사로 남아있다. 불행한 역사를 통해 평화라는 이름의 무게를 그 어느 나라보다도 무겁게 받아들이고 있을 콜롬비아가 평화롭게 전진하길 바란다.
그 날 오후, 콜롬비아 역사를 안주 삼은 맥주 한 잔은 달고 씁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