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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hn Mun Feb 24. 2022

<석유는 어떻게 세상을 지배하는가> 최지웅

#석유는어떻게세상을지배하는가 #최지웅 #부키 [평점 9.7 / 10.0]


석유의 역사는 근현대 국가 간 헤게모니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합니다. 석유를 이해해야 근현대사를 이해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석유에 대한 이해관계에 따라 굵직한 역사의 변화가 있었고, 이런 변화는 현재 진행형입니다. 또한 석유는 달러의 패권과도 큰 연관성이 있습니다. 금본위제가 폐지된 이후에도 달러가 기축통화의 지위를 유지한 뒷 배경에도 석유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석유가 달러로 결제되기 때문입니다.


"석유는 어떻게 세상을 지배하는가"는 이런 석유의 역사를 쉽게 정리한 책입니다. 매우 쉽고 간결하게 정리되어 있습니다. 석유와 근현대사를 엮어서 설명해주고 있어 막힘없이 읽을 수 있었습니다. 배경지식이 많이 없더라도 쉽게 접할 수 있는 책이라 생각합니다. 책의 내용을 기반으로 석유의 역사를 간단히 정리해보겠습니다.


1. 메이저 회사의 시대 (~1960년대)


-수요보다는 공급이 많았던 시대

-석유라는 재화를 사용할 수 있는 시장개척(수요 확대)이 중요했음

-석유의 주요 공급자였던 중동 국가들은 석유생산에 필요한 자본과 기술 없었음

-가격의 결정권은 메이저 석유회사가 했고, 석유를 지배했음

-메이저 석유회사 : 앵글로 페르시안 석유, 뉴저지 스탠더드 오일, 뉴욕 스탠더드 오일, 로열 더치 쉘, 셰브론, 걸프오일, 텍사코

-중동 국가들의 석유 무기화 시도가 있었으나, OPEC 국가 간의 협의 실패 및 기타 지역의 석유 공급 확대로 실패로 돌아감


2. OPEC의 시대 (1970년대)


-미국의 마셜플랜으로 동맹국의 주요 연료를 석탄에서 석유로 전환함. 이를 통해 수요 확대를 견인

-즉 미국은 석유의 수요처를 넓히고 석유를 지배하는 전략으로 글로벌 헤게모니의 중심 역할을 수행함

-이때부터는 공급보다는 수요가 많아지게 됨

-공급자 파워가 강해지면서 중동국가들의 힘이 강해지고, OPEC의 목소리가 커짐

-OPEC 국가들은 석유 감산조치를 통해 오일쇼크를 주도함, 그리고 성공함 (1973년 1차 오일쇼크,  1979년 2차 오일쇼크)

-미국과 중동국가들의 갈등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며 군사력도 동원함

 

3. 시장 상품화의 시대 (1980년대 원유 선물거래의 시작 이후~)


-오일쇼크의 경험 후 석유 가격의 안정성을 원하게 됨

-중동 국가도 감산으로 인한 P의 증가 vs 감산으로 인한 Q의 감소라는 게임이론 상황에서 Q의 감소를 부정적으로 인식

-이는 OPEC의 감산으로 러시아, 미국, 동남아시아, 중남미 국가의 석유 시장점유율이 올라가게 되었기 때문

-이런 상황에서 석유를 상품화하여 자본시장에서 거래할 수 있는 선물시장이 생김

-원유 가격의 결정권이 생산자(OPEC)에서 시장(자본)으로 옮겨감

-가격 결정권의 변화와 OPEC의 시장점유율 유지 전략 과잉공급을 경험하고 이는 원유 가격의 폭락으로 이어짐(1986년, 2014년)


4. 911과 셰일가스 (1990년대부터 오늘날)


-소련의 붕괴로 미국 일강 체제가 형성됨

-미국 중심의 세계화로 자본의 힘이 중심이 되는 시장이 열림

-초대형 자본 기업 = 메이저 석유 회사들의 초대형 인수합병이 이뤄짐

-엑손모빌, 셰브런, BP, 토털 등장

-미국의 강력한 영향력은 중동과 중앙아시아까지 확장됨

-이에 반대하는 알카에다와 탈레반이 등장함

-종교적 차이를 떠나 경제적 수탈에 대한 반발심, 이교도 국가인 이스라엘 등의 원인으로 중동의 테러가 심화됨

-이는 911의 단초가 됨

-2000년대에 들어서는 셰일의 발견과 생산이 확대됨

-미국은 최대 석유 생산국으로 위치가 변화함

-석유를 생산하는 중동지역의 중요도가 하락함

-이로 인해 2017년 이후 미국의 정치적/경제적 태도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선언하는 등 중동 정책에 과감해졌고 동맹국에게 더 많은 비용을 청구함(물론 트럼프가..)



영국은 20세기 중반까지 중동 지역에서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했고 그 열매로 이 지역의 석유 질서를 주도합니다. 이 모든 것의 시작은 위험을 무릅쓰고 영국 함대의 연료를 석유로 전환한 처칠의 결단이었습니다. 처칠은 석유에 기반한 해군력 강화naval supremacy upon oil에 전력을 쏟기로 결심하고 이렇게 말합니다. 지배는 모험을 무릅쓴 것에 대한 포상prize이다.


영국과 미국은 영미석유협약을 맺고 두 나라에서 각 4명씩, 총 8명으로 구성된 국제석유위원회International Petroleum Commission를 구성합니다. 이 기구는 각국의 권장 생산량, 시장 조절 방안 등을 협의하게 됩니다. 이런 생산량 조절과 관련한 협약은 이후 석유 역사에서 일관적으로 나타납니다. 1960년대 이후 나타난 OPEC에서도 그런 특징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수습된 수에즈 위기는 현대 국제 질서의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적인 힘의 이동을 보여 주면서 새로운 질서를 명확히 하는 계기가 됩니다. 미국은 영국과 프랑스를 이집트에서 철수시킴으로써 국제 질서에서 주도적 지위를 확립합니다.22 반면 영국과 프랑스는 자신들이 미국과 소련 같은 초강대국이 아님을 인식하게 되고 그에 맞춰 새로운 전략을 수립합니다


케네디 정부의 중남미 경제 원조는 소련이 아닌 쿠바 혁명의 확산을 막기 위함이었다는 것, 그리고 출범 초기 단계였던 OPEC을 견제하고 중남미 최대 산유국인 베네수엘라 등 중남미 국가의 반미 노선을 방지하겠다는 의도가 추가된 것 정도가 다를 뿐입니다.


아랍 국가들은 전쟁 패배로 군사력의 심각한 불균형이 드러나면서 외교적 지위가 약해졌을 뿐 아니라, 석유 무기화에도 실패하여 큰 좌절과 분노를 겪게 됩니다. 그러나 대망의 1970년대가 열리면서 아랍이 반격할 여건이 조성됩니다. 그 여건을 만들어 준 것은 다름 아닌 석유 시장의 변화였습니다.


1941년 7월 일본은 인도차이나를 공격합니다. 이에 대한 반발로 미국의 루스벨트 정부는 일본에 대한 석유 금수 조치를 단행합니다. 진주만 공습은 그로부터 5개월 후인 1941년 12월에 이루어집니다.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와 보르네오섬 등에서 생산된 석유를 미국 함대의 방해 없이 안전하게 일본으로 수송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하와이 진주만에 있는 미 해군 전력을 무력화하여 일본 원유 수송 라인의 측면 위협을 제거하고 동남아에서 안전하게 석유를 운송하려 한 것입니다.


미국의 추가 생산 능력이 있는 상황에서는 아랍이 석유를 무기로 사용할 수 없었다. 그러나 미국의 가동률이 100퍼센트에 이르게 되자, 석유 시장의 수호자였던 미국은 더 이상 석유 무기화에 대항할 수 없게 되었다.3

오늘날 지구촌 곳곳에서 실시되는 미국, 중국 등의 군사 훈련 역시 유사시 실제 군사력의 전개를 훈련으로 위장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전략적인 가치가 큽니다.  


일반적으로 한 국가의 주권에 영향을 주는 요소로 국방, 식량, 에너지를 들 수 있습니다. 한 국가가 이 세 가지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면 외국에 일방적으로 의존하게 되어 자주권 확보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국방, 식량, 에너지 영역에서의 역량 확보는 경제적 가치 외에 비경제적 가치도 함께 고려하며 접근해야 합니다.


석기 시대는 돌이 부족해져서 끝난 것이 아니다. 석유 시대는 석유가 고갈되기 전에 끝날 것이다. - 자키 야마니, 전 사우디 석유 장관


야마니는 석유의 꾸준한 수요 증대를 위해 유가를 낮게 안정적으로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고유가가 지속될 경우 세계 경제는 침체를 넘어 장기적인 불황에 빠질 수 있고, 이는 결국 석유 소비 감소로 이어진다는 것이 그의 논리였습니다.


팔레비 왕정하에서 석유로 인한 부가 오히려 사회를 병들게 하고 독재를 강화하자 이란 국민들은 다른 곳에서 희망을 찾습니다. 바로 이슬람 원리주의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팔레비 왕가에 반기를 든 혁명가이자 이란 시아파 지도자 아야톨라 호메이니Ayatollah Ruhollah Khomeini가 영향력을 확대합니다.


이를 ‘이란 혁명’ 또는 ‘이슬람 혁명’이라 부릅니다. 2차 오일쇼크는 이러한 혁명 과정에서 발생한 것입니다. 정리하면 이란 혁명은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요인이 모두 작용한 결과였습니다. 정치적으로는 팔레비의 장기 집권과 이를 유지하기 위한 비밀경찰 조직의 반인권적인 감시와 처형, 경제적으로는 석유 수익으로 발생한 부의 불균형과 인플레이션의 심화, 사회적으로는 이슬람 전통을 무시한 서구화 정책에 대한 반발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습니다.


OPEC의 인위적인 고유가 정책은 비OPEC 국가의 생산량 증대를 야기하며 OPEC의 시장 지배력을 약화시켰습니다. 고유가로 인해 세계 에너지에서 석유가 차지하는 비중도 줄었습니다. 1978년에는 선진 공업국의 전체 에너지 중 석유가 53퍼센트를 차지했으나 1985년에는 43퍼센트로 축소됩니다.13 석유 수요가 줄면서 서서히 공급 과잉의 시대로 옮아갑니다. 또한 지속적인 가격 인상으로 OPEC 공식 가격OSP의 신뢰성과 수용성이 추락하자, 시장은 새로운 기준 유가의 등장을 요구합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1970년까지는 영미계 메이저 석유 회사가 압도적인 기술과 자본으로 석유 산업을 지배했던 시대였습니다.


미국은 이 시기에 마셜 플랜을 실행하며 서유럽에 경제 원조를 시행했는데, 뉴욕대학 중동연구센터 소장을 역임한 티머시 미첼Timothy Mitchell은 마셜 플랜의 주요 목적이 서유럽의 주요 에너지를 석탄에서 석유로 전환시키는 것이었다고 설명합니다.


즉, 미국은 세계의 주요 에너지원을 석유로 바꾼 후, 석유를 지배하는 전략을 취하여 동맹국을 통제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산업화의 진전과 마셜 플랜 등으로 인해 석유 수요는 급속히 증가했습니다. 지속적인 수요 증가로 인해 1970년을 기점으로 새로운 시대가 열립니다. 바로 이 시점에 잉여 생산량이 소멸하고 수요가 공급을 초과합니다. 이제 시장의 힘은 공급자인 OPEC으로 옮겨갑니다. 그래서 1970년 이후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를 ‘OPEC 지배 시대’라 부릅니다


중동 국가들은 이 시기에 석유를 무기화해 오일쇼크를 일으키기도 하고, 외교의 지렛대로 활용하기도 합니다. 또한 우월한 시장 지위 덕분에 OPEC이 석유 판매 가격을 정합니다. OPEC 회의 때마다 석유 공식 판매 가격을 결정하는 것이 중요한 의제이자 이슈였습니다.


2000년 이전의 석유사는 ‘메이저 지배 시대’, ‘OPEC 지배 시대’ 그리고 ‘시장 상품화 시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각 시대마다 유가를 정하는 주체가 달랐습니다. 메이저 지배 시대에는 메이저 석유 회사, OPEC 지배 시대에는 대체로 OPEC, 그리고 시장 상품화 시대에는 시장이 그 주체입니다.


OPEC의 공식 판매 가격이 무력해지면서 유가가 미국과 영국이 주도하는 시장과 금융의 영향력 아래로 편입되었기 때문입니다.


왜 이들 언론과 기관은 1986년과 2014년이 비슷하다고 입을 모은 것일까요? 이를 이해하기 위한 키워드가 있습니다. 바로 ‘시장 점유율’입니다. 앞서 말한 자료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유가 하락의 배경은 산유국의 점유율 경쟁입니다.


우리 사우디는 현재의 생산량을 유지해도 2050년까지 파낼 수 있다. 우리 입장은 알제리나 나이지리아처럼 매장량이 많지 않은 나라와 다르다.33 매장량이 많지 않은 국가의 석유 장관은 생산 물량을 조절하여 고유가를 유도하는 정책을 주장할 수도 있다. 그들은 단기적인 이익이 우선이다. 그러나 고유가 정책은 석유 시대의 종말을 앞당길 수 있다. 우리의 연구 결과로는 유가가 30달러 이상이 될 경우 셰일 오일과 원자력을 비롯한 대체 에너지 개발이 경제성을 갖게 된다.34 석기 시대는 돌이 부족해져서 끝난 것이 아니다.


정유업체는 원유 가격과 제품유 가격의 차이가 일정하게 유지되어야 수익을 발생시킬 수 있습니다. 만약 원유를 구매한 직후 운송ㆍ정제 기간 동안 제품유의 가격이 하락하면 정유업체는 손실을 봅니다. 얼핏 생각하면 정제 과정에서 부가가치가 더해지기에 제품유 가격이 원유 가격보다 더 높아야 합니다. 하지만 유가는 등락을 거듭하기에 제품유가 원유보다 저렴해지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정유업체는 이러한 역마진 리스크(또는 정제 마진이 손익 분기점 이하로 하락할 리스크) 때문에 대량의 원유 구매를 꺼립니다.


사우디의 ‘잃어버린 점유율 10년’의 시대는 점유율 회복이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 줍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산유국은 점유율 상실을 극도로 기피합니다. BP의 통계 자료에 따르면 1980년대 초반 사우디가 감산하던 시기에 비OPEC 산유국은 시장 점유율을 크게 확대합니다. 이때 확대된 OPEC과 비OPEC 간의 점유율 차이는 2000년대 초반까지 쉽게 좁혀지지 않습니다.


사우디의 단호한 자세에 진땀이 난 산유국들은 1987년 이후 감산 합의를 잘 이행하게 됩니다. 그리고 유가는 배럴당 18달러 수준에서 안정됩니다. 야마니의 필사즉생必死卽生의 대처가 없었다면 감산 합의는 어려웠을지도 모릅니다.


9.11 테러는 미국에서 여객기를 탈취하여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서방 문화와 영어에 익숙한 인력이 필요했습니다. 즉, 서방에서 나고 자랐거나 유학한 무슬림 학생들이 큰 역할을 합니다. 특히 함부르크 그룹이라 불리는 함부르크 그룹이라 불리는 함부르크 유학생들이 9.11 테러를 행한 여객기에 탑승하고 있었습니다. 미국에 대한 증오로 뭉친 이들은 영어에 능통했고, 비행기 조종 능력과 같은 기술적 역량도 갖추고 있었습니다.20 엘리트이면서 서구 문화에 익숙하고 미래가 유망한 이들이 끔찍한 테러를 주도한 것입니다. 이들의 분노는 종교적 분노 또는 유럽에서 무슬림으로 겪어야 했던 개인적 경험에서 비롯된 분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테러의 보다 보편적이고 근본적인 출발점은 팔레스타인 문제였고, 그 이후로 진행된 석유로 인한 갈등과 분쟁, 부패와 빈곤은 거대한 반서구 정서의 양분이 됩니다.


종교적 차이는 증오를 불러올 수 있고, 종교가 가진 맹목성은 무력 사용의 주요 원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9.11 테러에서 나타난 분노의 기원 그리고 지금까지 이어지는 이슬람과 서구의 반목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제국주의 시절부터 이어진 침탈의 역사입니다.


중동과 아랍은 20세기 석유 개발의 역사에서 부의 상당 부분을 서구가 빼앗아 갔다고 여깁니다. 그들이 아랍의 ‘토지’라고 여기는 팔레스타인 지역에 이교도의 국가를 건설한 것도 테러의 주요 이유입니다

미국의 대외 정책에서 상대국이 민주 정권인지 독재 정권인지도 석유 이익 앞에서는 중요한 문제가 아닌 듯 보입니다. 미국은 이익을 좇아 민주 정권을 무너뜨리고 독재 정권을 지원하는 모습도 보여 주었습니다. 앞장에서 소개한 BTC 송유관은 아제르바이잔의 바쿠에서 출발합니다. 이 송유관을 건설하기 위해 미국은 아제르바이잔의 부패한 세습 독재 정권을 지원했습니다. 반면 이란의 모사데크는 서구 의회의 전통을 따라 민주적인 방식으로 선출된 총리였지만 미국의 이익에 반했기 때문에 축출되었습니다.

2018년에는 하루 1100만 배럴 수준을 기록하면서 사우디와 러시아를 제치고 세계 최고 수준에 도달합니다. 이러한 추세는 앞으로도 지속되어 미국이 당분간 세계 최대 산유국 지위에 있을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입니다.

이 전쟁은 9.11 테러에 대한 대응으로 시작되었지만 테러를 주도한 빈 라덴은 사우디 국적이었고 테러 가담자의 과반수가 사우디인이었습니다.36 9.11 테러와 이라크의 연결 고리는 약했습니다. 또한 이라크에 대량 살상 무기가 숨겨져 있다는 구실도 세계를 설득하지 못했습니다.


미국 내 부동산 가격 하락에서 시작된 소동이 어떻게 전 세계로 확산되었는지 그 구조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합니다. 시작은 주택 담보 대출의 부실이었지만 확산은 전혀 다른 차원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금융 자본에는 투자와 대부에 대한 보상으로 제빵사의 ‘부를 이전’할 수 있는 기능이 있습니다. 이것은 금융 자본의 본질적 속성입니다. 이를 활용할 수 있는 미국의 금융 자본과 다국적 기업은 자본 시장 개방에 긴밀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기에 자본 시장 개방과 세계화를 정책으로 요구합니다.45 국제 통화의 확립과 금융의 세계화는 거대 자본이 부를 효과적으로 이전하는 환경을 마련해 주기 때문입니다.


정리하면 2008년 금융 위기는 미국 내 주택 가격의 하락에서 시작했지만 그것이 글로벌 위기로 확산된 데는 달러라는 국제 통화와 이에 기반한 금융 세계화에 근본적인 원인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셰일 혁명의 영향은 2017년 이후부터 명확해지고 있습니다. 셰일 오일의 급증이 미국의 정치적ㆍ경제적 태도에 영향을 주고 있음을 세계가 목도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중동 정책에 더 과감해졌고, 동맹국에게는 더 많은 비용을 청구하고 있습니다. 2017년 말 미국은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선언했습니다. 2018년 이후에는 이란과 기존 핵 합의를 파기하고 더욱 엄격한 핵 합의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셰일 오일로 강해진 경제 체력을 바탕으로, 출혈을 감수하며 중국과 무역 전쟁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요컨대 유럽과 중동에서 경제적ㆍ군사적 패권을 가질 만한 국가가 없고, 지역 분쟁이 미국의 이익을 위협할 가능성도 줄었습니다. 그러므로 미국은 힘을 빼고 유럽과 중동을 관리해도 됩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2010년 이후 10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미국의 원유 생산량이 2배 이상 급증했기 때문입니다. 운동 경기에 비유하자면 미국은 셰일 오일로 대량 득점에 성공한 상황입니다. 점수 차이가 많이 나는 상황에서 감독은 주전을 빼고 경기를 운영해도 됩니다


세계 현대사는 기-승-전-석유 혹은 석유-승-전-결의 역사였습니다. 오일쇼크, 세계화, 자유 무역, 테러, 금융 위기, 초저금리 그리고 오늘날 미국의 고립주의까지 현대사의 핵심 국면에서 석유는 늘 주요한 결정 요인으로 작용했습니다. 그렇게 석유는 오늘을 결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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