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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ho Oct 11. 2022

수요일의 환경스터디

같은 의지의 사람이 둘 이상 모이면 생기는 일

 처음 환경문제에 관심을 가졌을 때는 집에서 혼자 다큐를 보거나, 환경 영화들을 보거나 책을 찾아 읽곤 했다. 제로웨이스트 마켓에 놀러가서 어떤 물건들이 있나 구경하는 소소한 재미가 있었고, 우연한 기회로 갔던 비건페스티벌에서 신념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고 큰 영감을 받았었다. 비건 음식들은 생각보다 맛있었다.


 환경덕질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다 보니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잦아졌다. 지구온난화 문제를 꼬집는 영상을 보면 점점 더 초조해지고, 제로웨이스트를 실천해보고자 면보자기나 모아뒀던 비닐봉지를 들고 마트에 가도 모든 과일, 야채들이 이미 비닐봉지에 싸여저 있으니 좌절감이 들기가 일쑤였다. 한번은 가져간 지퍼백에 감자를 담아 바코드를 붙여달라고 직원한테 내밀었더니 퉁명스러운 반응이 돌아왔다.


"이런거 쓰지 마시고 저기 비닐봉지 있으니까 거기에 담아오세요."

"아, 비닐봉지 안 쓰고 싶어서 그런데.."

"그런 개인 사정은 다 봐줄 수 없고 여기선 비닐봉지 쓰셔야 해요."


 순간 화가 나서 따질까 하다가 그냥 도로 감자를 두고 돌아나왔다. 카카오톡 오픈채팅방 '쓰레기 없는 세상을 꿈꾸는 방(쓰없방)'에 하소연했더니 반응이 제각각이었다. 그 순간에 따지면 우리 같은 사람들의 이미지가 극단적이고 공격적으로 보일 수 있다, 혹은 그 분이 너무 무례하다, 나 같아도 화가 났을거다 등등.. 내가 사회에서 주류를 거스르는 소수자가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피부에 와닿은 순간이었다.


 축산업이 배출하는 온실가스가 모든 교통수단을 합한 것보다 많다는 UN보고서 내용을 보고난 후부터, 육식을 조금씩 줄여나가기 시작했다. 샤워할 때 물 조금씩 아끼는 것도 좋지만 맥도날드 햄버거를 한번 먹으면 두 달치 샤워를 할 때 사용하는 물의 양과 맞먹는다고 한다.* 채식을 하려다보니 많은 요리를 집에서 직접 만들어야 하고, 거기다 제로웨이스트까지 하려니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혼자 해서는 지속할 힘이 점점 떨어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출처 : 다큐 '카우스피라시'


 채식에 대한 정보를 얻고 고충을 나누기 위해서 카카오톡 '채식 정보의 모든 것. 채식, 함께해요!'라는 오픈채팅방에 들어갔다. 채식에 관한 정보를 얻으며 간간히 도움을 받다가 어느 날 환경스터디를 진행한다는 공지가 올라왔다. 2주에 한번 수요일마다 환경(주로 채식)에 관련된 서적을 읽고 모여서 토론을 하거나 생각을 공유하는 모임이었다. 일반 독서모임은 많이 봤지만 내가 요즘 자주 읽는 채식과 환경에 대한 서적을 읽는다 하니 재미있을 것 같아 바로 신청했다.


 나는 두 번째 차수부터 참여했는데, 아래는 우리가 함께 읽은 책 리스트이다.

우리는 왜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을까 - 멜라니 조이

기후위기와 비즈니스의 미래 - 김지석

비건 세상 만들기 - 토바이어스 리나르트

노 임팩트 맨 - 콜린 베번

노화의 종말 - 데이비드 싱클레어

살고 싶다, 사는 동안 더 행복하길 바라고 - 전범선

최종 경고: 6도의 멸종 - 마크 라이너스

나는 풍요로웠고, 지구는 달라졌다 - 호프 자런

가난해지지 않는 마음 - 양다솔

나의 친애하는 비건 친구들에게 - 멜라니 조이


'우리는 왜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을까'에서는 우리가 당연시해오고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했던 육식주의라는 시스템을 가시화시키고, 이 시스템의 모순에 대해서 꼬집는다. 예를 들면 젖소는 태어날 때부터 젖소가 아니다. 인간과 똑같이 소가 젖을 짜려면 임신을 해야 하고, 그 젖은 당연히 송아지가 먹어야 하지만 송아지는 어미와 격리가 되고 젖소는 인간을 먹이기 위한 젖을 짠다. 무려 송아지가 먹는 젖의 10배나 많은 젖을. 그러다 보니 당연히 몸이 축나고 건강이 빠르게 나빠지는데, 그 끝에는 도살이 기다리고 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사실을, 우리는 당연히 우리가 먹을 우유를 생산해주는 젖소가 따로 있다고 생각해왔다. 육식주의의 언어에서는 집단적으로 일어나는 학살을 정상적이고 자연스럽고 필요한 것으로 (3N : Normal, Natural, Necessary) 정의한다. 그리고 이는 식민지배와 노예제도와 성차별주의에서도 사용하는 정당화의 방법이다.


'노 임팩트 맨'에서는 뉴욕 한복판에서 어디까지 제로웨이스트를 할 수 있을지 실험하는 한 아빠의 이야기를 읽었다. 그가 천기저귀 사용, 텀블러 사용, 무포장 식료품점 이용, 엘레베이터 대신 계단 이용, 자동차나 비행기 안타기, 고기와 해산물 끊기 등 여러가지 실험들을 하면서 느낀 점들은 나에게 공감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제로웨이스트를 하면서 힘든 점들도 많았지만 결국에는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선택함으로써 얻는 뿌듯함과 긍정적인 변화가 내 자존감을 더 높여주었다. 제로웨이스트는 금욕적인 생활이 아니라, 나와 나에게 온 물건을 가꾸고 돌보는데 더 시간을 들이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의 친애하는 비건 친구들에게' 에서는 비건-논비건 관계를 떠나 서로 다른 신념과 가치관 때문에 부딪히는 관계에 있어서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어떤 태도로 대화를 이끌어나가면 좋을지에 대한 심리학적인 분석을 볼 수 있었다. 비건과 논비건의 관계의 갈등은 애초에 조금씩 금이 가고 있었던 관계에 비건이라는 것이 말다툼의 구실이 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꼭 비건일 뿐만아니라 다른 어떤 새로운 가치관이 그 관계에 들어왔어도 어차피 무너질 관계였다는 것이다. 신념 문제로 다툴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있는 관계를 먼저 돌본다면 비건이든 아니든 관계의 경험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은 나와 부모님 사이의 갈등을 돌아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내가 비건식을 시작하면서 마치 내가 학생이었을 때처럼 크게 다툰 적이 두어 번 있었는데, 그 내용은 결국 비건 문제가 아니라 서로의 표현 방식이 틀렸다고 지적하고 있는 것이었다. 좋은 관계를 위한 건강한 소통의 원칙을 제시해주는데, 앞으로 부모님과 소통할 때 이 원칙들을 되새길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들을 함께 읽고 생각을 나누면서 얻은 것은 단순히 내 지식의 확장 뿐만 아니라 서로 앞으로를 살아갈 희망을 얻는다는 것이다. 환경 문제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앞으로 살아갈 미래를 걱정한다는 것이고, 채식을 한다는 것은 지속가능한 환경을 위해서, 잔인하게 죽어나가는 동물들의 권리를 위해서, 그리고 우리 몸의 건강을 위해서 나아가야 할 올바른 방향을 고민한다는 것이다. 지구가 살고 생태계가 살아야 우리 인류의 몸과 마음도 건강할 수 있기에 환경과 채식은 전혀 별개의 문제가 아니다. 그렇기에 이러한 가치관을 공유하는 사람들은 사회적 강자이건 약자이건 간에 다 함께 공존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기꺼이 손을 내밀 의향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런 사람들은 보통의 사회에서는 주류에 저항하는 비주류 소수집단으로 보이기 때문에 쉽게 공격당한다. 소수자들의 요구는 정당한 요구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가령 식당에서 고기를 빼달라고 하거나, 내가 가져간 용기에 포장을 해달라고 하면 바쁘다는 이유로 거절하거나 머뭇거리는 경우가 있다. 논비건 친구들에게 비건 식당에 가자고 하면 유독 받아들이기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 반대로 알러지가 있는 사람에게 그 알러지 있는 음식을 파는 곳에 가자고 하는 것은 폭력적이지 않은가? 우리는 서로 다른 욕구를 지닌 사람들이라는 것을 기본적으로 인지한다면 타협을 찾아가는 과정을 귀찮은 과정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을 것인데 말이다. 나 또한 집안에서 부모님과의 마찰이 잦은 편이다. 채식을 해서 약해보인다, 영양분이 부족할테니 영양제를 챙겨먹어라, 남편이 너 때문에 고기를 못 먹는게 아니냐 등등. 잘못된 편견과 섣부른 판단에서 오는 잔소리에 시달리는 것도 지쳐있던 상태였다.

 

 약자의 입장이 되어보니 깨달았다. 우리는 우리 안에 내재된 주류 사회의 언어로 나도 모르게 그들을 차별해왔다는 것을. 나 또한 어쩌면 내 편을 찾기 위해 이 모임을 찾았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함께 공부하는 지식들과 더 나은 세상에 대한 해답이 옳은 방향임을 확인받고 싶었다. 그리고 세상을 바꾸기 위한 투쟁에 필요한 무기를 갖추고 연대의 힘으로 나 자신 또한 단단해짐을 느끼고 있었다.

 우리는 모두 어느 때와 장소에서는 강자이고, 어느 때와 장소에서는 약자가 된다. 내가 약자가 되는 집단에서 받은 슬픔과 설움을, 내가 강자가 되는 집단에서 풀어내지는 않았는지 돌이켜본다. 그리고 같은 의지를 가진 사람들과 함께 얻는 희망적인 에너지를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전할 수 있을지 고민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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