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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ho Nov 02. 2022

침묵하고 돌아서서 외칩니다

지금은 삶의 대전환이 필요한 때


22.10.29 이태원 사고 희생자들을 추모하며


(*참사 이후 날 것의 감정을 그대로 쏟아낸 글이라 조금 거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침묵의 애도만 할 것이 아니라 어쩌면 더 처절하게 삶을 살아내고 더 치열하게 싸우고 분노해야 한다. 더 목소리를 내고 더 원인규명을 하고 더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더 큰 공론의 장을 형성해야 한다. 더 나은 사회를 위해 고민해야 한다. 우리 아이들이 안전하게 살아갈 사회를 만들기 위해 더 처절하게 살아내야 한다.

더 정치적인 목소리를 내는데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이건 어쩌면 나를 향해 하는 말이다. 정치는 선택이 아니라 삶이다. 살고 있다면 필수적인 요소이다.


잊지 말자. 세월호 희생자들과 힘든 삶을 살아내려 일하다가 목숨을 잃은 공장 노동자들과 매년 수백명씩 떨어져 죽는 건설현장 노동자들을. 더 빨리 배송하려 몸이 축나도록 일하다 쓰러지는 배달원들을. 산불과 홍수와 태풍으로 한 순간에 터전을 잃는 사람들을. 그저 축제를 즐기러 갔다가 생명을 잃은 안타까운 목숨들을. 지나고 보면 모든 것은 막을 수 있었다고 안타까워한다. 지금도 많은 삶의 현장에서 사람들은 위태로운 외줄타기를 한다.


경쟁보다는 협동을, 욕심보다는 양보를, 오해보다는 이해를, 차별보다는 평등을 먼저 되새길 때이다. 자본의 논리에 따르면 효율성이 가장 우선시 되기에, ‘이 정도는 괜찮겠지’하는 안일한 생각이 자연스레 들게 된다. 안전수칙을 어기게 된다. 더 큰 효율성을 위해 직원들을 감시하고 압박한다. 경쟁을 붙이고 매출을 더 올리라고 채찍질한다. 또다시 돈으로 보상하고 또다시 경쟁을 붙인다. 더 많이 벌고 남들보다 높이 올라가고 더 넓은 집에 사는 것이 성공이라고 말한다.

성장을 위해, 더 많은 자원을 쓰기 위해 자연이 파괴되고 사람들과 야생동물들은 안전하게 살 곳을 잃는다.

얼마 전부터 운전을 하기 시작했는데, 진하게 선팅이 된 차 안에서 사람들은 인내심을 잃는다. 하루 건너 하나 꼴로 접촉사고 현장을 목격하는데 대부분 안전거리 미확보와 양보의 부재이다. 한시라도 빨리 가고 싶기에 언제나 내가 옆 차량보다 더 바쁜 사람이다. 길이 헷갈려 조금이라도 머뭇거리면 클락션을 울리기 일쑤다.

나랑 조금 다른 사람들이 보이면 거부감을 갖는다. 장애인, 성소수자, 비건, 페미니스트, 정상—이라 불리는—가족에서 벗어난 사람들, 우리보다 못 사는 나라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들을 보며 은근한 우월감을 느낀다.

출산율이 낮으니 더 낳으면 지원금 주는 보상식의 정책을 세우기 이전에 안전하지 않은 사회에서 과연 아이를 낳아 키우고 싶은 마음이 생기겠는가를 고민하는 것이 우선이다.


비교하고 질투하고 경쟁하고 밀어내는 사회에서 위로, 더 위로 올라가 성공하는 것을 미덕으로 가르치는 사회에서 우리는 양보와 협동, 배려와 존중을 바랄 수 있을까. 그 밑에는 어떤 형태로든 희생되는 무고한 생명들이 ‘항상’ 존재한다.


대체 무엇이 부족해서 더 벌고 더 성장해야 하는가. 왜 우리는 더 넓은 집과 더 좋은 외제차를 타야만 하는가. 그리고 더 많은 것을 가졌을 때 과연 행복했는가. 거기서 만족하고 멈출 수 있었는가. 끊임없이 내 위에 있는 사람들만 목이 빠져라 바라보았는가. 발밑에서 일어나는 치열한 삶의 투쟁을 보았는가. 여전히 국민의 다수는 하루하루 삶을 살아내는 것이 유일한 생의 목표인데, 나보다 잘 사는 사람들과 비교하고, 언제까지 내가 가지지 못한 것에만 관심을 가질 것인가.

더 나은 삶을 위한 목표가 동기부여가 될지는 몰라도, 허망하고 덧없는 욕심과 건강한 의식의 성장을 위한 동기부여를 구분해야 한다. 진정으로 더 나은 삶이 무엇인지 고민해보아야 한다.


우리는 여태껏 삶에서 무엇이 우선순위였나.

나는 기후위기와 자연과의 공존에 목소리를 내는 편인데, 이것은 가장 등한시되고 가장 와닿지 않는 주제이다. 자연재해로 치부되기 쉽고, 자연재해이기 때문에 희생자들을 애도한 후 빠르게 잊는다. 기후위기로 잦아지고 강해지는 자연재해는 인재이다. 성장의 동력인 탄소배출로 이 지구가 점점 인간이 살기 척박한 환경이 되고 세대를 거듭할수록 깨끗한 물과 공기를 잃어간다면 그것은 인재이다.

기후위기로 가장 많이 터전을 잃는 사람들은 소득이 낮은 취약계층이다. 취약계층이라는 표현도 경제적 표현이 아닌가. 어떤 사람들은 그저 자기가 좋아서 산속에 살 수도 있고, 어떤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쭉 살아왔던 고향에 살고 있는데 갑자기 동네에 화력발전소가 생길 수도 있고, 어떤 사람들은 자진하여 부족함의 미덕을 추구하는 것일 수도 있다. 어떤 동물들은 그저 유일하게 살 수 있는 환경인 갯벌에 살고 있는데 한 순간에 삶의 터전이 매립되어 목숨을 잃는 것일 수도 있다. 다양한 삶의 방식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 모든 것이 수도권과 성장 중심으로만 돌아가는 사회. 좀 많이 이상하다.


어렵다. 너무 많은 것이 얽혀있고, 너무 많은 부분이 잘못되었다. 한국 사회에서, 어려운 비건과 제로 웨이스트를 굳이 굳이 고집하며 까다로운 사람이 된 것도, 뜬금없이 그 힘들다는 농사를 짓고 퍼머컬처를 배우는 것도 세상에 대한 나의 작디작은 호소이자 외침이다.

사회의 부조리에 그만 침묵하고 이제는 외치자.

“우리 함께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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