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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ho Jun 12. 2023

잘 못 지내고 있습니다.

두려움을 마주하기


“잘 지내요?”

“네, 그냥 똑같죠 뭐.”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들의 안부인사에 또 상투적으로 대답한다.


사실 그리 잘 지내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요즘은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배우기 시작했고, 가고자 하는 길을 정했고, 내가 꿈꾸는 미래를 준비하고 있으니 나름 잘 살고 있다고 칠 수 있겠다. 체력을 유지하기 위해 운동도 꾸준히 하고, 삼시세끼 건강하게 챙겨 먹으니 여드름 투성이었던 내 피부가 이제는 광이 난다는 말을 계속 듣고 있다.



요 며칠 사이 텃밭에 여러 친구들이 놀러 왔다. 긴 산책을 못 시켜줘서 답답해한다는 누룽지는 수락산 아래 퍼머컬처 밭에 도착해서 차에서 내리는 순간 표정이 달라지는 것이 한눈에 보였다. 까만 콧구멍으로 흘러 들어오는 공기부터 다르다는 것을 알았던 걸까. 누룽지는 열심히 이곳저곳을 탐색하며 킁킁 냄새를 맡고 맛을 보는데 여념이 없었다. 다양한 허브가 향을 뿜어내는 텃밭 한가운데 서있는 누룽지의 모습이 아름다웠다.


집 앞 텃밭에 딸기가 많이 익었길래 딸기를 유독 좋아하는 친구가 생각이 났다. 혼자 따는 것도 힘들고, 노지딸기는 금방 먹지 않으면 물러지니 열리는 족족 부지런히 먹어줘야 하는데, 친구한테 연락하니 퇴근 후 아이와 함께 한 걸음에 달려와주었다. 온 집중력을 동원하여 진지하게 딸기를 찾는 두 살 배기 아이의 모습을 보니 흐뭇했다. 엉덩이에 옷에 빨간 딸기물을 묻혀가며 열심히 바구니에 딸기를 담다가, 나중에는 따는 족족 입으로 들어가기 시작한다. 맛있었나 보다. 친구는 신난 아이를 보며 이런 귀한 기회를 주어서 고맙다고 했다.


밭에 갈 때마다 나는 식물을 돌보러 가지만 오히려 큰 위안을 받고 오는 것 같다. 내가 밭에 있을 때는 잘 몰랐는데 막상 밭에 있는 동물들과 사람들을 보니 벅차도록 아름답다. 꾸며낸 행복이 아니라는 것이 표정에서 그대로 느껴진다. 우리는 자연 속에 있을 때 비로소 생동감을 되찾는다. 농사를 지으면서 나는 자연의 돌봄을 받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요즘은 하루가 멀다 하고, 나를 돌봐주는 자연이 사라지는 광경을 목격한다. 자연이 사라지면 나는 어디에서 돌봄을 받지? 숲이 베어지고 아파트 단지가 생기면, 밭이 없어지고 쇼핑몰이 생기면, 숲에서 밭에서 위안을 받던 우리들은 또 한 발짝 밀려난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나? 더 뒤로, 더 멀리, 더 안 보이는 곳으로, 더 낭떠러지로. 점점 더 밀려난다. 자본이 장악한 세상은 생명들을 점점 밀어낸다. 돈을 내지 않으면 너희는 살 곳이 없어. 그렇게 우리는 호랑이, 멧돼지, 고라니, 여우, 고양이, 새들을 밀어냈고, 벌과 나비, 지렁이, 무당벌레를 밀어냈었다. 이제는 내가 밀려나고 있다.


2년 전 환경영화제를 처음 보고 받았던 신선한 충격은 세상을 보는 내 눈을 뜨게 해 주었다. 작년에도, 올해도 어김없이 환경영화제를 챙겨봤는데 올해의 느낌은 조금 다른 것 같았다. 자연환경을 지키는 일을 하겠다고 스스로에게 선포하고도, 환경단체에서 활동을 시작하고도, 날이 갈수록 침체되고 무기력해지는 기분은 무얼까. 환경영화들을 봤음에도 이 무기력감이 큰 의지로 다시 바뀌지는 않았다. 각자의 자리에서 힘을 내어 싸우는 사람들을 보고도, 내가 2년 전보다 더 많은 일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성취감이나 보람은 크지 않다. 그저 나를 돌보기 위한 삶을 사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 같다. 나를 보는 혹자는 그래도 잘하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매년 사라지는 숲을 볼 때, 죽어가는 바다를 볼 때, 나는 두려움을 느낀다. 기후가 눈에 띄게 변화해도 변하지 않는 사회를 볼 때, 허탈함을 느낀다.


나를 돌보는 자연의 안위가 많이 걱정된다.

나는 잘 못 지내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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