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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풀밭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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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ho Jul 04. 2023

생태계가 살아있는 숲밭이란

멧돼지와 함께 살 수 있을까

 여느 때 같았으면 풀로 무성하게 뒤덮여 있어야 할 땅 한 켠이 훤히 드러나 있다. 말로만 듣던 멧돼지가 드디어 내 밭에 왔다 갔다는 것을 알아챘다.


수락산 아래 인과의 숲에서 농사를 시작한 지 2년 차. 수락산에서 더 가까운 윗밭에서는 고라니가 모종을 똑똑 뜯어먹었다는 제보가 하루가 멀다 하고 들려온다.

‘고라니는 상추를 엄청 좋아해, 상추는 심는 족족 모조리 뜯어먹는다니까~’ ‘내 밭에선 토마토도, 당근도, 허브 모종도 죄다 뜯어먹었어' ‘올해는 먹을 게 없어, 콩이나 먹어야지'


내 밭의 일이 아니라서 다행인가 싶다가도 내 일처럼 생각해 보니 마음 한켠이 쓰리다. 모종을 심을 때 흘리는 땀은, 이 작은 모종이 자라서 결실을 맺을 그날을 상상하면 상쇄가 되는데, 내가 고라니에게 먹거리를 공급하기 위해 노동을 했다니. 얼마나 허무할까. 하지만 생태농부로 뭉친 우리에겐 고라니의 접근을 막기 위해 손 쓸 수 있는 묘안이 없다. 십시일반 조금씩 모아서 유지하는 공동체기에 튼튼하고 높은 담을 세울만한 예산도 없고, 또 웬만한 높이의 담은 고라니가 훌쩍 뛰어넘어 들어오고, 웬만한 강도의 담은 멧돼지가 몸집으로 뚫고 들어온다고 하니 뚜렷한 해답은 아닌 것 같다. 생태텃밭 서적에서 제시하는 방법은 고라니가 좋아하는 베리류의 나무를 밭 테두리에 심으라는 것이었는데, 다들 자기 밭 관리하느라 그럴 시간도 여유도 없어 보인다.


그렇게 윗밭에서 들려온 소식을 다시 잊고 지내다가 지난 주말에 오랜만에 방문한 내 밭에서 멧돼지의 흔적을 발견한 것이었다. 멧돼지는 모종을 먹지는 않지만 흙 위를 뒹굴거리며 흙목욕을 하고, 흙을 코로 파헤치고, 그 안에 숨은 지렁이를 찾아 먹는 것이라고들 추측한다. 그런 과정에서 내가 심었던 모종이 통째로 파헤쳐 드러나 있거나, 어린 나무는 뿌리째 누워있거나, 나뭇가지 하나가 뚝 부러져있거나 하기 십상이다. 게다가 멧돼지가 좋아한다는 고구마랑 옥수수는 금지 작물이다. 나도 고구마랑 옥수수 좋아하는데..


이러한 고충을 공유하니 강북구 도시텃밭에서 농사짓는 한 농부가 말했다. 그들도 멧돼지가 자꾸 찾아와서 고민이었다. 처음에는 생명을 죽이지 않으면서 먹거리도 보호하는 이상적인 방법만 고민하며 공동체 내에 다툼이 일어나기도 했다. 하지만 이내 자신들의 터전에 들어와서 이런저런 맛있는 것을 심어주고, 놀이터도 만들어놓는 인간들을 바라보는 멧돼지의 입장을 생각해보고 나서는 이런 문제 자체를 인정하고 해결해 나가는 그 과정 자체가 삶이라고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한다.


생태적인 삶을 살겠다 다짐했을 때 과연 나는 어디까지 자연인이 되어야 하고, 어디까지 탄소를 배출하는 문명을 거부해야 하는 것인지 고민이 컸다. 아직도 우왕좌왕 갈팡질팡이다. 나는 생태계를 설계하는 퍼머컬처 농사에 매료되어 시작했음에도 고라니와 멧돼지의 방문이 그닥 반갑지는 않았고, 집에 퇴비함을 만들어놓고 이제 완벽한 순환의 사이클을 만들었다고 뿌듯해했음에도 가루응애가 생겨 경악하고 퇴비함의 흙을 모조리 버려버렸던 모순덩어리이다.

밭에 가려면 탄소를 배출하는 차를 타고 가야하고, 여전히 더우면 에어컨을 켜는 이 사회 시스템에서 해방된다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 생태적인 삶을 홍보하고 알리려면 결국 의존하게 되는 sns와 다양한 홍보채널 등.

나는 거부하지만 의존하고 있다. 현재의 편안한 삶과 미래의 삶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다. 현재의 나와 미래의 내가 양팔을 잡고 줄다리기하고 있다.

비틀비틀... 흔들흔들... 이쪽으로 한 발, 저쪽으로 한 발.

고집스런 거부와 치열한 운동, 변화를 위한 몸부림. 그 어딘가에서 방황하고 있지만 언젠가 잘 안착하고 꿈과 희망만으로 가득한 그 날을 맞을 수 있을까.


멧돼지 코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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