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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풀밭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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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ho Sep 08. 2023

이상한 9월의 날씨와 녹아버린 배추

처서와 백로를 지나며

8월 23일, 처서가 지나면 마법처럼 더위가 가신다는 처서매직이라는 단어가 무용해질 만큼 여전히 한낮 햇볕은 뜨거웠다. 8월 내내 너무 뜨거워서 밭에 갈 기운이 나질 않았다. 어쩌다 용기를 내어 새벽 6시에 출발하여 밭에 나가서 여차저차하고 8시만 되어도 이미 등에는 땀 한줄기가 내려오고 있었다. 자연히 나의 풀밭일지 기록도 게을러졌다.


8월 31일, 조금은 선선해진 아침의 바람이 손등을 스칠 때쯤, 새벽잠이 많은 나는 이제는 괜찮겠지 하는 생각에 느지막이 9시에 출발하여 밭에 도착했다. 12시 반쯤, 벌겋게 익은 얼굴과 등이 흥건히 젖은 티셔츠로 밭을 나와 점심을 먹었다.


그래도 해가 내 머리 위에 있는 정오에 야외에 있을 수 있는 게 어디겠냐마는, 9월이 1주일쯤 지난 오늘도 한낮의 햇볕은 뜨겁다는 사실이 나를 약간 질리게 만들었다. 심지어 요즘은 장마가 지나고 성장한 모기떼의 습격도 한몫한다.


하지만 이제 힘든 이야기는 그만하고 8월의 식탁을 풍성하게 해 준 밭의 산물들을 기록해보려 한다. 농사를 짓는다면 누구나 키우는 방울토마토는 사실 빨갛게 익는 시점이 죄다 달라서 자주 가서 따먹어야 한다. 따려고 보면 위에부터 초록색, 약간 주황빛이 도는 초록색, 주황색, 빨간색, 그리고 과하게 익어 터져 버린 토마토들로 가득하다. 그러다 보니 8월에 발길이 뜸해진 동안 대부분의 잘 익은 토마토는 터져버린 상태였다. 3주(주;모종을 세는 단위) 정도 심은 토마토에서는 한 번 갈 때마다 10알 정도의 토마토를 수확할 수 있을 뿐이었다.


갓끈동부콩(롱빈)은 내가 심은 기억도 나질 않지만 역시 콩답게 무럭무럭 자라주었다. 지주대를 제대로 세워주지 않아 옆의 토마토 지주대를 침범해서 함께 올라가고 있었다. 생긴 것은 독특하나 콩깍지 그대로 볶아먹어도 된다는 말에 이런저런 채소와 함께 볶아보았는데, 식감도 맛도 좋았다. 역시나 알아서 잘 자라주는 공심채와 함께 간장과 된장 조금 넣고 간간하게 볶으니 최고의 반찬이다.


내가 제일 기대했던 수박은 마트 수박처럼 커질 것 같지 않아 배구공만 해졌을 때쯤 참지 못하고 따버렸다. 바쁘다는 핑계로 잘 찾아뵙지 못하는 할머니와 고모에게 가져다주었다. 고모가 칼을 집어넣자마자 쩍- 하고 갈라지니 잘 익었다며 놀라신다. 한 숟갈 퍼먹으니 그 단맛이 입에서 살살 녹는다. 어서 남은 수박들도 무럭무럭 자라서 엄마와 밭 동료들에게도 나누어주고 싶었다.


바가지를 만들 때 쓰이는 '박'은 옛날 초가집 지붕 그림에서나 보던 작물인데, 작년에 이어 올해도 내 밭에 어느새 자라고 있었다. 처음에는 호박 줄기가 어디서 나오더니 하얀 호박꽃이 피길래 이게 뭔가 싶었는데, 그게 바로 '박'이었다. 아마 누군가 버린 씨앗에서 시작되었나 보다. 이 생소한 열매를 어떻게 먹나 찾아봤다. 보통은 들깨국에 넣거나, 말리거나 볶아서 박나물로 해 먹는다고 한다. 식감은 무와 비슷하지만 더 부드럽고, 볶으면 수분이 나와 걸쭉해져서 덮밥양념으로 활용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유의 박 맛에는 특이점이 없으나 양념이 쏙 베어서 맛있는 반찬을 만들 수 있다.


이외에도 깻잎, 자소엽, 고추, 부추, 당귀, 눈개승마, 방아, 민트, 호박잎, 호박꽃 등 밭의 선물은 감사하다.

8월의 퍼머컬처 밭


9월 8일인 오늘은 절기상 '백로'라고 한다. 백로는 흰 이슬이라는 뜻으로 이때쯤이면 밤에 기온이 이슬점 이하로 내려가 풀잎이나 물체에 이슬이 맺히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아침 기운은 시원하지만 해는 뜨겁고 여전히 한낮의 기온은 32도, 체감상 8월 말쯤이다.


8월 말에 김장배추 모종을 심기 시작한다고 하니 8월 마지막 주에 부랴부랴 모종을 사서 심었는데 웬걸, 며칠 후에 가서 본 배추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바보같이 올해 기후가 심각하게 변한 것을 고려하지 않고 여태껏 지어왔던 관행에 따랐던 것이다. 또한 아직 더운 요즘 같은 때에는 해가 질 때쯤 심어놓고, 밤에 뿌리가 활착 하게끔 해줘야 한다고. 나의 무지와 한낮의 뜨거운 태양이 합쳐져 배추 12주는 모두 땅으로 되돌아가버렸다.


농부로서의 최종 목표는 김치와 된장, 간장, 고추장을 자급하는 것인데, 배추 재배 시작부터 난항이다. 배추와 열무, 무는 벌레들도 매우 좋아하는 작물이라고 하는데 농약을 뿌릴 수는 없는 일이니 그것 또한 고민이다.


어제 저녁 모기의 습격을 받으며 다시 심은 배추 10주는 제발 잘 자라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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