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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ho Apr 03. 2023

사랑을 배우고 있습니다 - (1)

아일랜드에서 만난 소중한 인연


 이것은 5년 전, 내가 비건이 되기 전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어쩌면 비건이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된 이야기이다.


  아일랜드 발 비행기에 홀로 몸을 실었다. 장기 여행의 시작을 혼자 해보는 것은 처음이라 좀 떨리고 설렜다. 동시에 그 지루한 스탑오버 시간을 어떻게 버틸지 걱정에 휩싸였다. 나의 여행메이트인 D가 아일랜드로 어학연수를 떠나버려 올해의 휴가는 어떻게 쓸까 고민하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냥 내가 아일랜드로 가면 같이 여행을 할 수 있으니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북아일랜드에 있는 '다크헤지스 Dark hedges'라는 유명한 너도밤나무길이 내 여행 버킷리스트에 있었다. (왕좌의 게임 촬영지로 유명하다고 하는데 나는 한 사진가의 사진 한 장에 홀려서 저장해 두었던 곳이다.) 인근 국가인 영국의 런던도 안 가봤으니 이어서 가면 아일랜드의 자연과 런던의 미술관, 박물관까지 섭렵하는 정말 완벽한 여행계획이 아닐 수 없었다.


 마당이 딸린 2~3층의 주택들이 모여있는 한적한 마을, 아침이면 큰 나무 사이사이에서 지저귀는 새들 소리에 못 이겨 일어나게 되는 게으름, 파란 하늘, 주민들이 삼삼오오 모여 운동하는 넓은 잔디가 깔린 공원. 아일랜드 할아버지 G의 집은 수도인 더블린에서는 조금 먼 외곽이었지만, 여유롭고 공기 좋은, 살고 싶은 동네였다. G의 집에 머물기로 결정한 것은 수많은 후기에도 불구하고 4.9점을 유지하는 높은 평점. 그리고 후기들의 대부분은 호스트인 G에 대한 칭찬이었다. (에어비앤비에서 호스트에 대한 칭찬이 많다는 것은 그 호스트가 정말로 친절하다는 뜻.) 혼자 머물게 될 것이기에 위치 좋은 숙소보다는 친절한 호스트가 있는 숙소에 마음이 갔다. G의 프로필 사진을 보니 인자한 미소를 지닌 백발의 할아버지였다. 그와의 만남이 기대가 됐다.


 G의 집에 도착하니 그 사진 속 미소와 같은 표정으로 나를 반긴다. 짐을 옮겨준 후, 집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깔끔하고 앤틱한 디자인의 거실과 주방, 작은 화장실 그리고 서재로 이루어진 1층을 지나 복도 옆 계단으로 올라가면 욕조가 딸린 큰 화장실과 3개의 방으로 나뉜 2층이 나온다. 방 하나는 G의 침실이고 나머지 2개를 숙박용으로 빌려주고 있었다. 그리고 또 계단을 올라가면 작은 다락방이 나오는데 그의 추억이 쌓인 물건들로 가득 채워진 보물창고 같았다. (어떤 그림들을 보여줬던 것 같은데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는 혼자 살고 있었다. 자식들은 프랑스며 영국이며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다고 한다.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의 사진을 보여주는 그의 얼굴엔 여전히 인자한 미소가 번져있었다. 이 커다란 집에 가족들과 함께 소란스럽게 지내다가 혼자 남았는데, 외롭지는 않을까? 괜한 걱정이 오지랖처럼 삐져나온다.


 아침에 졸린 눈을 뜨고 일어나 거실로 내려가면 G는 언제나 깔끔하고 단정한 옷차림으로 아침 인사를 건넨다. 부엌으로 가면 빵과 여러 가지 잼, 버터와 우유 등을 꺼내놓고, 샐러드와 과일을 가지런히 접시에 담아 내어준다. 그리고 하루는 스크램블, 하루는 써니사이드업, 하루는 삶은 달걀을 곁들여준다. 디저트 포크와 식사용 포크는 왼쪽, 나이프는 오른쪽에 정갈하게 배치된 모습을 보니 대접받는 기분이다. 내가 일찍 일어나건, 늦게 일어나건 내 시간에 맞춰서 아침을 준비해 준다.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아침을 준비해 놓겠다는 보통의 숙소와는 달리 G의 시간은 온전히 게스트의 시간에 맞춰진다. 함께 아침을 먹으며 오늘은 어디로 가서 뭘 할지 재잘대면, G는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나눠준다. 신기하게도 나는 말이 많은 편이 아닌데, 아침저녁으로 오가며 만나는 G에게는 이런저런 얘기들을 하고 있었다. G의 인자한 미소가 좋아서, 뭐라도 할 말을 쥐어짜고 싶었던 것 같다.


 사건이 터진 건 G의 집에 머문 지 아마 3일쯤 되는 날이었을 거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엄마에게 문자가 한 통 와있었다. 믿을 수 없어 한 번, 두 번 계속 보게 되는 소식이었다. 내가 키우던 고양이 하몽이를 부모님 집에 맡기고 왔었는데, 하몽이가 잘 지내다가 갑자기 쓰러져서 응급실에 와 있다는 내용이었다. 심장이 아픈 것 같다고 했다. 순간 몸이 굳어버렸다. 하지만 나는 문제가 터지면 감정에 사로잡히기보다는 해결책을 먼저 찾는 사람이 아닌가. 인스타그램 팔로워 중에 심장병으로 산소방에서 지내고 있다가 세상을 떠난 고양이가 생각났다. 급히 그 고양이 집사분께 메시지로 조언의 메시지를 보내놓고 인터넷에 고양이 심장병에 대해서 미친 듯이 검색하기 시작했다. HCM? 심근비대증? 이건가? 개구호흡, 혈뇨, 혈변? 이런 건 분명 없었는데..? 엄마에게 꼬치꼬치 캐물었다. '증상이 어떤데요? 의사가 뭐래요? 사진 좀 보내줘요.' 나는 다급한데 돌아오는 답변은 왜인지 느긋하다. '심장 쪽이 좀 아프대. 주사 맞고 지금은 자고 있어~ 입원해 있어서 사진은 못 찍는 상태라 나중에 보내줄게.' 그리고 앞으로 남은 일정은 취소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게 낫겠다는 말이 이어졌다. 사진을 계속 원했지만 보내주지 않았다. 작은 의구심이 올라왔다. 하지만 더 이상 아무것도 물어볼 수 없었다.


 혼란스러운 고민의 시간이 이어졌다.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두고 계산하기 시작했다. 남은 일주일여의 여행을 취소하는 것은 금전적인 리스크가 컸다. 하지만 계속 기어 나오는 불안한 마음은 억누르기가 힘들었다. 하몽이가 이미 세상을 떠났을 수도 있겠다는 의심을 애써 회피하고 있었지만, 앞으로 남은 여행을 온전히 즐길 수 없겠다는 것은 확실했다. 결국 잠시 후, 함께 런던을 여행할 생각에 신났을 D에게 구구절절 아쉬운 소식을 알리고 있었다. 며칠 후에 가려던 영국행 비행기를 한국행으로 바꾸기 위해 항공사에 전화를 했다. 이어지는 영국 숙소 취소, 버스 이동 편 취소 등등. 그리고 나서야 내 감정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아침 햇살이 내리쬐는 환한 방 안에 홀로 남은 채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았다. 원래 같았으면 새로운 하루에 대한 설렘으로 느껴졌을 햇살이 오늘은 서글펐다. 누군가에게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서투른 나는 예전부터 슬픈 날 떠오르는 해가 싫었다. 나의 눈물을 드러내기 때문에 싫었다. 햇빛의 밝고 긍정적인 이미지는 우울한 날에도 아무렇지 않게 하루를 시작해야 할 것 같은 부담감이 되기 때문에 싫었다. 창문을 겨우 가리는 얇은 커튼은 강하게 내리쬐는 햇빛을 가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2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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