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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ho Apr 20. 2023

사랑을 배우고 있습니다-(2)

아일랜드에서 만난 소중한 인연


사랑을 배우고 있습니다 1편에 이어지는 글입니다.


 1층으로 내려가니 역시 G가 아침인사를 건넸다.  ‘굿모닝~’ 대답하고 아침을 먹으며 덤덤한 척 이야기했다. 

‘내가 키우는 고양이가 많이 아프대. 앞으로의 일정은 취소하고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아.' 

더 늑장 부리면 나의 우울함이 다시 표정에 드러날 것 같아 아침을 먹자마자 황급히 숙소를 나왔다. D가 소식을 듣고 기꺼이 내가 머무는 숙소가 있는 동네로 와주었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표가 가장 빠른 게 3일 후라고 하니, 3일 동안의 계획을 세워야 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D가 계획을 세워 나를 이곳저곳 데려가 주었다는 것이 맞는 표현이겠다. 더블린과 근교 도시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는 D의 도움으로 딱히 머리 아프게 계획을 세우지 않고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다.

 멋진 현대식 도서관에서 귀여운 일러스트의 영어 동화책과 비싸서 살 엄두가 나지 않는 디자인 서적들을 읽고 맛난 시금치 키쉬를 먹었다. 해변가를 거닐며 물개를 구경하고 노란 들꽃이 가득한 언덕을 오르며 사진을 찍었다. 빈티지 마켓이 늘어선 길을 걸으며 쇼핑하다가 검은 길고양이를 만나 잠깐 놀아주었다. G의 집 근처에 있는 큰 공원에 가서 유럽식 정원의 아름다움에 감탄하고, 어린아이들이 뛰노는 모습을 보며 부러워하다가 큰 공작새가 돌아다니는 것을 보고 놀라 한동안 구경했다. 국립공원과 연결되어 있는 동네 근린공원의 트레킹 코스를 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원시림으로 변한 풍경에 기분이 좋아졌다. 


 해가 지기 전에 G의 집으로 돌아가면 G가 이런저런 말을 걸어온다. 오늘 하루는 어땠니, 뭘 봤니, 뭘 먹었니 등등. 그리고 함께 TV를 보자며 거실로 부른다. 마침 유럽에서 제일 유명한 오디션 프로그램의 준결승전이 있는 날이라고 한다. 90대에 가까운 나이의 G가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을 볼 줄이야. 다양한 국적, 연령대, 스타일의 사람들이 나와서 노래를 부르는데 약간 충격이다. 우리나라의 오디션 프로그램에서는 뭔가 유행하는 스타일의 노래만 나오는 것 같았는데, 정말 다양한 개성의 팀들이 무대를 장악한다. 

 하루는 G가 영화를 보지 않겠냐 제안한다. 아일랜드를 배경으로 한 유명한 영화라고 하는데, 영어라도 자막이 있어서 얼추 맥락을 이해할 수 있었다. 어려운 대사가 나오면 잠시 멈추고 G가 쉽고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G의 노련함이 느껴졌던 것은 영화가 클라이맥스에 다다를 때쯤이었다. 주인공의 수위 높은 스킨십이 나오는 약간 민망한 장면이 나올 때였는데, 그전부터 갑자기 나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하며 주의를 돌린다. 대화를 하다가 흘끗 화면을 보고서 이해했다.

 하루는 조금 일찍 숙소에 들어가서 쉬려고 했는데, G가 특별식을 차려준다. 비싼 생연어를 곁들인 샐러드였다. 거기에 후식으로 아이스크림까지. 저렴한 숙박비에 이렇게까지 받아도 되나 싶었다. 


 어떤 아침에는 일어나 집 앞 공원을 걸었다. 푸른 하늘과 들판, 나무와 새가 지저귀는 소리는 아이들의 행복에 겨운 목소리와 하모니를 이루고 있었다. 가라앉은 내 마음의 소리는 행복의 소리에 어울리지 못했다. 그 소리를 씻어내려는 듯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오직 행복만이 존재할 것 같은 이 세상에 나는 이방인이었다. 보통은 어떤 힘든 일도 좋게 기억되는 여행 중에 갑작스럽게 찾아온 슬픔을 나는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모른 채로 이리저리 휩쓸려 다녔던 게 아닐까. 혼자 남겨질 때면 커지는 어두운 그림자도 마주하기 힘들었고, 누군가와 함께할 때면 연기처럼 비집고 나오는 감정의 괴물을 꾹꾹 누르고 있기도 힘들었다. 다만 나에게 따뜻한 미소를 건네주는 G도, 특유의 밝은 에너지로 이곳저곳을 데리고 다녀주는 D도 없었다면 나는 이미 그 괴물에게 잡아 먹혔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날, G는 그의 숙소에서 기꺼이 D와 함께 잘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리고 D도 자신의 집에서 1시간이 넘는 숙소에 기꺼이 짐을 들고 나타나 주었다. 그날 밤, 잠결에 왠지 D의 흐느끼는 듯한 소리를 들은 것 같다. 아는 척을 할 용기가 없어 자는 척을 했다. 


 차마 물어볼 수 없었던 질문에 답변을 듣고 난 후 며칠 동안은 오피스텔에 돌아가지 못하고 부모님 집에 머물렀다. 혼자 있었다면 밥도 제대로 챙겨 먹지 않았을 터였다. 부모님도 슬펐겠지만, 일 끝나고 와서 저녁마다 애써 나에게 말을 걸어주었다. 주말이 되고 간단한 장례식을 치른 후, 다니는 절에 있는 한 나무 아래 유골을 묻었다. 밤이면 찾아오는 감정의 괴물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작아지고 약해졌다. 어쩐지 무섭기만 하던 밤은 어느새 괜찮아졌다. G와 D가 함께 더블린의 한국 식당에 가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고 함께 하고 싶었다. 나의 슬픔을 함께 해주던 사람들이 보고 싶었다. 


 5년이 흐른 지금, 나는 이제야 깨달았다. 그때 내 주위에 있던 것이 사랑이었음을. 한 사람이 무너지지 않도록, 혼자 있고 싶다고 해도 고집스레 곁에 머물러주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될 수 있음을. 그리고 하몽이가 땅 속으로 돌아감으로 인해 내 몸과 이 땅 위의 생명들이 더 연결됨을 느꼈다. 이 땅을 함께 살아가는 모든 생명들을 돌보는 것이 곧 내 몸을 돌보는 것이라는 것을 마음으로 알아버렸다. 사랑하는 존재의 죽음은 그렇게 내 마음속에서 빛난다. 그 빛으로 나는 존재한다. 이제 그 빛으로 나는 사랑하는 존재를 돌보려 한다. 


이 모든 것이 내 마음속에선 죽음이요,
이 세계의 슬픔이다.
이 모든 것들이, 죽기에, 내 마음속에 살아있다.
그리고 내 마음은 이 온 우주보다 조금 더 크다.

텅 비워진 공간에서 어찌할 바 모르고 슬퍼하던 시인은, 그 공간으로 시간을 데려오기로 한다. 내가 존재하는 한 내가 잃은 것도 내 안에 존재한다는 초월적인 시간에 바쳐진 마음은 이제 우주보다 더 커진다. 그렇게 커진 마음은 더는 허무하지 않다. 수만 년 전에 죽은 별처럼, 마음속에 촘촘히 들어와 빛나는 것이 있어서이다. 

-시와 산책, 한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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