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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ho Apr 30. 2023

나의 해방 선언

내 이야기가 노래가 되는 순간

요즘은 하루 건너 심심치 않게 보이는 기후위기 뉴스. 봄의 극심한 가뭄도, 대형 산불도, 강남 일대를 마비시킨 물폭탄도, 매번 널뛰기하는 마트 물가도.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기엔 이 정도 위기로는 아직 부족한가 보다.


환경 운동을 시작한 이후로 이러한 사람들의 무관심이 너무 답답했고, 왠지 모를 배신감에 휩싸였다. 기후 우울증을 겪는 모든 환경 운동가가 그러하듯. 이런 극심한 기후 변화에도 피부로 와닿는 마트물가에도 사람들의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풀리지 않는 해답은 나를 끝없는 무기력증과 우울, 고독한 싸움의 반복으로 밀어 넣었다.


4월 22일 지구의날. 청년기후긴급행동 멤버들이 여의도 공원에 모였다. 지구의 날을 맞아 국회의사당을 향해 확성기 시위라도 하려나 싶었다.

전혀 아니었다. 나의 해방과 지구의 해방을 연결한다는 기조로 함께 모였다.


나의 해방? 그게 뭘까. 나를 억압하는 사회의 굴레에서 사표를 던진 순간 나는 이미 벗어났는걸.

나는 농사를 짓는다며 호미를 드는 순간 이미 해방을 선언했다고 생각했다.


422 지구해방의 날, 여의도 공원


다양한 생김새와 취향, 성향의 사람들이 모였다. 각자의 세계에서 살던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였다. 잔디에 누워 몸의 감각을 일깨워보고, 서로의 표정을 살펴보고, 함께 노래를 부르고, 공동선언문을 읽었다.

그리고 조심스레 각자의 이야기를 꺼냈다.


사람들은 각자 마음 깊은 곳에 숨기고만 싶었던 억압과 아픔, 상처, 고통의 기억을 뱉어냈다. 수면 위로 올라온 그 기억들을 똑똑히 다시 보며 그 기억으로부터 해방을 선언했다. 각자가 살고 싶은 삶의 방향성과 왜 기후운동, 사회운동에 뛰어들게 되었는지 솔직하게 고백하는 용기 있는 얼굴들을 보았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의 아픔이 드러났다. 나는 해방되어 있지 않은 상태라는 것을 알았다. 내가 숨기고 숨겨왔던 아픔을 생각했다.


 그날 나는 깨달았다. 자기 자신의 이야기와 지구의 이야기가 연결되는 경험을 통해 사람들은 비로소 이 땅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고. 20명 남짓 모인 이 자리에서 우리가 함께 일으킨 물결, 그 파장들이 조금 더 넓게 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나의 이야기를 하기로.


나의 이야기가 더 넓은 파장을 일으켜서 누군가의 마음에 울림을 준다면 나는 꿋꿋하게 내 이야기를 할 용기를 내겠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미래를 우리가 만들자고 약속했습니다.
상처 입은 우리가 이전과 같이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상처 낸 가시를 어떻게 감싸 안을지 고민하자고 약속했습니다.

우리 함께 노래합시다.
처음 듣는 노래에도 박자에 맞추어 몸을 들썩이고,
음율을 따라 부르며, 간간이 들리는 단어에 무언가 떠올려봅시다.

이 별의 들썩임과 울림, 그리고 이야기를 노래합시다.
내 삶이 이야기가 되고, 이야기가 노래가 될 때,
그리고 우리가 함께 부를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됩니다.

청년기후긴급행동 - ‘지구해방의 날 공동선언문’ 중에서




나의 해방 선언문


2018년 5월 12일 하몽이가 죽었다.


그리고 나도 죽었다.


나는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두렵다. 누군가 내 감정을 알아채는 것이 두렵다. 나의 세계에서 나는 감정을 억압하길 요구받으며 살아왔고, 감정을 통제하는 것이 익숙한 삶을 살아왔다.

기쁨, 슬픔, 놀라움, 분노, 황홀, 우울.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감정들. 나에게는 감추어야 하는 것들로 여겨졌다.

나의 감정들을 꾹꾹 눌러놓고 살아가다 보니, 타인의 감정에도 관심이 없었다. 타인을 향한 나의 말과 행동, 표현들은 모두 이성적인 판단으로 이루어졌다.

나의 날카로운 말과 행동에 상처를 받았을지도 모를 많은 사람들이 떠올랐다. 타인의 아픔을 모르는 나는 이 차가운 도시가 키운 철저히 개인주의적인 사람이었다.


그러다 고양이가 나에게 왔다.

한 생명을 돌보는 일을 시작하면서 나는 당연히 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몽이가 죽고 나서야 알아챘다. 나는 인간의 방식으로 고양이를 대하고 있었다는 것을. 고양이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법을 전혀 몰랐고, 인간의 세상에 함께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치기에 급급했다.


그래도 나름 최선을 다해 마음을 쓰고 돌보았던 나의 서툰 사랑을 통해 나는 어떤 생명과의 소통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사람이든, 고양이이든, 강아지이든, 나무이든, 풀이든.

우리는 모두 존재함으로 서로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하몽이가 죽음으로 인해 다른 존재의 죽음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세월호 희생자들,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

비자림로 확장 공사에서 죽은 나무들,

일터에서 열심히 일하다가 죽은 노동자들,

조용히 살해당한 수많은 환경운동가들,

인간의 활동으로 인해 갑자기 삶의 터전을 잃고 죽어간 아름다운 갯벌의 생명들.


그리고 그 존재들을 지키기 위해 고독한 싸움에 뛰어들었다.


하몽이의 죽음으로 외롭게 죽어간 존재들이 내 안에서 연결되었다. 그리고 나는 다짐한다.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모든 존재들을 돌보기를. 내 마음속에서 빛이 된 아픈 존재들의 별자리를 바라보며 세상을 살아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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