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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ho Nov 07. 2023

트라우마와 함께하기

비건이 되기까지

작업실에서 수 차례 열었던 비건 포틀럭 파티에서 호스트와 게스트의 관계로 만났던 사람들을 밭에서도 또 만나는 경험이 신기했다. 한 번은 ‘라이프쉐어 커뮤니티’라는 곳에서 열린 춤명상 캠프에 비건 케이터링을 준비하는 역할로 갔는데, 캠프 참여자 중 한 명이 포틀럭 파티에 왔던 손님이었다. 두 번째 분은 어제(10/15) 열린 밭 오픈데이를 홍보하는 포스팅을 sns에 올렸더니 그걸 보고 오신 손님이다.



아침저녁으로 추울 정도로 쌀쌀한 기운이 몸속으로 스며드는 가을이 무르익는 계절, 수락산 아래 퍼머컬처* 농장의 거점인 '수락간' 오픈데이가 있었다. 퍼머컬처 밭 소개와 투어, 뮤지션들의 공연과 농사꾼들이 만든 생활재나 먹거리를 판매하는 장터, 그리고 토트네스 전환마을**을 다녀온 활동가들의 후기 공유회 등 풍부한 이야기들로 채워진 시간이었다.


무해하고 안전한 공동체라고 생각했던 이곳에서 열린 행사가 무척 좋았지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자꾸만 마음에 남는다. 토트네스 전환마을의 한 농장에서는 잦은 사슴 피해의 해결책으로 결국 사냥꾼을 불러 사슴 고기로 판매한다는 이야기나, 생선 요리를 먹은 이야기 등 육식주의의 언어로 전달되는 내용들이 있었다.

비건에서 생태농부로의 길은 자연스럽게 열려있는 것 같은데 생태농부에서 비건으로 가는 길은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개인적인 좁은 경험이라 실제로는 다를 수도 있겠다. 비건 실천을 하는 사람들 중에서는 작게라도 베란다 텃밭을 하거나 생태농업, 자급의 삶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하지만 파괴적인 관행농사를 거부하고 땅과 미생물을 살리는 농사꾼이라면 무릇 비거니즘에 대해서도 공감하리라 믿었는데, 가까이서 살펴본 결과 생태농부 중에서도 비건을 실천하는 이들은 소수였다. 심지어 내가 속해있는 퍼머컬처 공동체에서도 비건(또는 비건지향)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모임이 있는 날이면 함께 반찬을 나누어 먹는데, 모임 때만이라도 비건 지향을 해보자는 무언의 규칙이 있지만 종종 젓갈이나 알류가 포함된 동물성 반찬이 올라온다. 요즘 활동 중인 청년기후긴급행동에서도 이 사안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만큼, 나 또한 비거니즘과 먹거리 운동을 연결 지을 수 있는 고리가 무엇일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던 와중이었다.




3년쯤 됐을까, 나는 심각해지는 환경 문제에 위기를 느끼고 비건 지향을 시작했었다. 덩어리 고기와 육수, 큰 생선(물살이), 유제품까지 순서대로 줄이고 끊었다. 비건을 지향하는 이들에게 보편적으로 비슷할 것이라 예상하는 점은, 덩어리 고기와 큰 생선(물살이)을 끊는 것은 어느 정도 수월하다는 것이다. 나 또한 그랬다. 하지만 수많은 음식에 들어있는 우유(소젖)와 계란(닭알), 작은 생선(물살이)까지 내 일상적인 식단에서 빼버리기란 참 힘든 과정이었다. 사회에서 유지되던 관계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환경문제에 목소리를 내고 실천하는 커뮤니티에 함께하면서 만나는 사람들도 서서히 달라졌지만 여전히 우유(소젖)와 계란(닭알), 작은 생선(물살이)들까지 끊기는 힘들었다. 어렸을 적 즐겨 먹었던 음식의 맛이 자꾸만 생각이 났고, 특히 가족들과 음식을 먹으면서 함께 시간을 보냈던 추억이 떠오르며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나 혼자 끊는 것은 쉽지만 가족들도 함께 같은 음식을 먹으며 즐거움을 공유하는 시간이 소중했다.


이를 끊을 수 있었던 것은 비건 페스티벌에 참여해서 우연히 봤던 영상 때문이었다. 모든 것이 즐겁고 신나 보이는 축제 한가운데에 설치된 모니터에서는 영상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호기심에 유심히 보았다. ‘쓸모’가 없다고 판단된 수평아리들이 컨테이너 벨트에 올려지고 그 마지막에 분쇄기로 떨어져 버리는 영상이었다. 충격적이었다. 건강상의 이유로 계란을 가끔 먹는 정도는 괜찮을 거라고 안주했던 내가 부끄러웠다. 수평아리는 걸러지고, 산란을 위해 길러지는 닭들은 손바닥만 한 케이지에서 몸이 축나도록 닭알을 ‘생산’해내는 것이었다.


그 이후 동물권에 관심이 생겨 관련 다큐들을 많이 보았다. 우유를 생산하는 젖소는 사실 날 때부터 젖소가 아니었다. 젖소라는 말도 우리가 붙인 말일 뿐, 젖이 나오려면 임신을 해야 한다. 온 생애를 인간을 위한 젖을 짜는데 바쳐졌던 소의 마지막 행보는 도살장이다. 수 차례의 임신과 착유에 축날 대로 축난 몸을 비틀거리며 걷는 소의 뒷모습을 본 이후론 유제품을 먹을 수 없었다. 마트에 가면 음식 뒷면 성분표에 우유(소젖)가 함유되어 있는지 꼼꼼하게 확인했다.


해양생태계를 파괴하는 대량어업은 바다의 생태계를 무차별적으로 싹쓸이한다. 한 종의 물살이를 잡기 위해서 내려졌던 그물은 무수한 부수어획***으로 이어진다. 생태계를 유지하던 생명들이 사라진 바다에는 백화현상 즉, 바다 사막화가 진행된다.


의도적이든 아니든, 알지 못했던 사실을 맞닥뜨리는 경험은 나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내가 무심코 하는 선택들이 생태계에 유해한 선택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나는 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세상에 벌어지는 끔찍한 현장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도 못 본 체 하는 것도 나의 선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알게 되면 먹을 수 있는 게 없다"는 말 또한 폭력에 가담하는 선택이었다. 내가 생태계에 가하는 폭력의 실체를 알고 싶었다.


눈물을 흘리고 상처받을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찾아본 영상은 도살장에 잠입해 실태를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도미니언'이다. 우리가 마트에서 만나는 육류를 만들기 위해 동물이 도살되는 모든 과정이 잔혹했다. 죽음으로 끌려가는 소가 흘리는 눈물이 내 눈물이 되었다. 당연히 잔혹할거라 생각했지만 내가 좋아하는 육식을 멈추기 싫기 때문에 보기 싫어했던 장면이다. 알고 있었지만 몰랐던 장면이다. 아마도 예전 시골마을처럼 특별한 날에, 소나 돼지를 직접 도살하는 모습을 눈 앞에서 목격했더라면 진즉에 채식주의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밥을 주고 돌보고, 나와 삶을 함께하는 동물들을 죽여서 먹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다.


나는 일부러 나 스스로에게 트라우마를 심어버린 셈이 되었다. 영상을 본 후에 해소할 수 없는 슬픔과 우울감을 느꼈다. 믿었던 세상에 대한 배신감을 느꼈다. 장면을 자꾸 떠올리게 하는 육류에 대한 이미지는 너무 자주, 쉽게 소비되고 있었다. 그런 이미지가 TV에서 또는 길거리에서 보일 때마다 괴로웠다. 이는 모두 트라우마의 일반적인 특징이라고 한다.


어쩌면 어릴 적 추억과 사회적 관계를 이어주던 음식을 채식으로 완전히 전환할 수 있었던 계기는 트라우마였다. 줄이는 것은 어느 정도 의지로 가능하지만 전환하는 것은 트라우마로 가능했다. 하지만 이를 다른 트라우마와 달리 '현실 직시하기'라고 명명하고 싶다. 광주 민주화 운동, 제주 4.3 사건 등 역사적으로 겪어왔던 끔찍한 사건들을 지속적으로 기억해야 하는 것처럼, 현실에서 지금 이 순간에도 일어나고 있는 끔찍하고 파괴적인 학살을 목격하는 것은 이제는 선택이 아니라 의무이지 않을까.


기후위기가 인간 삶의 존속을 위협하는 시대에,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종속 관계에서 연대의 관계로 바꾸기 위해서는 자연을 다루는 우리의 태도부터 다시 바라보아야 한다. 풀과 나무, 땅과 바다, 동물과 곤충들은 우리의 삶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다. 생태적 삶을 되찾고 싶은 많은 이들에게 함께 현실을 직시할 용기를 내보자고 손 내밀고 싶다.



*퍼머컬처 : Permanent(영속적인)와 agriculture(농업)의 합성어로, 생태계를 살리는 지속가능한 농법이자, 삶의 방식 또는 철학이다. 나무와 관목, 다년생 식물들과 1년생 작물들을 함께 심어서 자생하는 숲과 같은 다층적 구조를 만든다고 하여 이렇게 조성된 밭을 숲밭이라고도 부른다.
**토트네스 전환마을 : 영국 남서부에 위치한 토트네스에서는 전환마을 운동이 일었다. 전환마을 운동은 자연을 자원으로 인지하며 우리의 삶터를 오염시키고 파괴하는 기존의 체계에서 벗어나 경제적 자립과 에너지 자립, 생태계 속에 존재하는 인간으로서의 삶으로 전환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공동체 운동이다.
***부수어획 : 낚시나 그물에 의해 의도치 않게 잡힌 해양 생물을 말한다. 부수어획은 상어나 돌고래, 거북이 등의 주요 사망 원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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