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주혜 Mar 31. 2023

내가 고양이를 키워도 될 상인가?

냥집사 (셀프) 자격 검증기

사실 난 고양이가 무서워서 고양이를 피해 다니는 사람이었다. 어쩌다 길에서 고양이를 마주치면 1초, 2초, 3초... 얼음이 되어버렸고 냥이들은 무서워하는 걸 아는 건지 뭔가 더 호기롭게 빡센(?) 모습으로 길을 비켜주지 않았다. 그러면 난 뒤돌아 다른 길을 향해 갔지만 그마저도 무서웠다. 냥이가 따라올까 봐 뛰어서 도망도 못 갔다. 만약 뛰어가면 안 따라오려던 냥이가 혹시라도 따라오고 싶어질까봐 호다다닥 걸음을 옮겼다. 냥이 앞에서 나는 쭈구리였다.


강아지도 키워본 적 없었지만 막연히 동물을 키운다면 몽실몽실한 하얀 말티즈를 키우고 싶었었다. 정말 막연한 생각에 지나지 않은 이 생각이 어찌하여 강아지가 아닌 고양이로 변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심지어 냥이에게 첫눈에 뿅 가버린... 그래서 집사의 삶을 살겠다는 의연한 다짐을 하게 만든 이야기를 풀어보려 한다.




고양이를 키우시는 지인 집에 종종 갈 일이 있었다. 주인에게 마저도 한껏 도도한 냥이이기에 나에게는 관심이 1도 없는 것은 당연. 그래서 먼발치에서 냥이님을 바라보는 게 고작이었다. 그 고양이를 보면 언제나 '공주님'이라는 단어가 생각이 날 만큼 예쁠 뿐만 아니라 우아한 태생적 남다름이 느껴지는 그런 고양이었다. 최근에 다시 방문한 지인 집에서 냥이는 도도하게 나 따위는 시야에도 두지 않겠다는 듯한 애티튜드를 보여주며 닿을 수 없는 별처럼 먼발치에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을 뿐이었다.


고양이들은 아는 척을 하면 싫어한다길래 이름이라도 불러볼까 하는 마음을 접어놓고 목구멍에서 맴도는 말도 삼키고, 쳐다보면 기분 나빠할 수도 있다기에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그런데 꼬리를 우산 손잡이처럼 세우고 도도하게 총총 내 앞으로 먼저 다가오더니 고개를 슈~욱 들어서 나를 빤히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내가 고양이를 무서워하는 가장 큰 이유는 눈이었다. 고양이 눈이 너무 무서워서 쳐다볼 수가 없었는데, 나를 빤히 바라보는 그 고양이의 노란 금빛 눈에 반해버린 것이었다. 삶은 역시 아이러니...!


공주냥이의 예쁜 눈이 아른 거렸다. 그날부터였다. 내가 고양이를 키울 수 있는가에 대한 스스로에 대한 자문자답에서부터 키워도 되는 이유, 키워야 하는 이유 그리고 나라는 인간의 라이프 스타일이 고양이와 함께 어우러질 수 있는가에 대한 자격검증까지. 두뇌가 풀가동 되었다. 상당히 똑똑했던 것만 같아 뿌듯했다 ^-^*




첫번째. 나는 나는 집순이


사회생활에서 만난 이들은 내가 집순이라는 사실에 적잖이 놀라곤 한다. 왜 그런지 모르겠으나, 집 밖에서의 생활에서 나는 꽤나 외향적이고 활동적인 인간으로 비치나 보다. 그러나 나는 '회사-집'이라는 단순한 동선을 좀처럼 벗어나지 않는다. 집에 한발 들이는 순간 다시 밖으로 나가는 것은 내게 너무나 힘이 드는 일이다.(나 역시 영역동물인 것일까...?) 코로나에 걸려 자가격리를 할 때에도 격리는 7일이었으나 9일째 되는 날 밖에 나갈까 말까를 고민했던 나로서는 집안의 생활이 꽤나 행복하고 만족스럽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도대체 집에서 뭐 하고 놀길래 밖에 안 나가냐고 묻곤 하는데, 보통 책을 읽고 글을 쓰거나 종종 드라마 몰아보기를 하고 사부작사부작 식물들에 물도 주고 셀프 속눈썹 펌도 해주고, 커피도 갈아먹어야 하고, 만년필로 글씨연습도 해야 하고 할 일이 천지다. 12년간 냥이를 기른 직장 동료에게 자질검증을 요청했다. 백점만점에 백점을 받았다.(통이오~~~~~ 얼쑤!)



두번째. 넓은 집으로 이사(상대적으로 넓은 집임. 절대적으로 넓은 집 절대 아님)


혼자 살게 되면서 잠시 거처로 삼아 살고 있는 지금의 집을 떠나 약 보름 후면 이사를 간다. 혼자 살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집이고 냥이 한 마리를 키워도 쾌적할 것 같은 공간으로 가기에 공간적인 면에서 제약이 없었다. 말로만 듣던 영끌을 실행한 덕에 집주인의 눈치를 볼일도 없었다. 냥이를 키운다면 냥이에게 집 공간을 너그러이 내어줄 의향이 가득가득하다!



세번째. 아들내미의 단호함


이제 일곱 살이 된 아들은 4살 때부터도 동물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지나가는 강아지들에게 겁도 없이 다가가기 일쑤였고 길냥이들을 만나면 이리 오라고 손짓을 해대는 아이였다. 동물을 좋아하는 아들은 여전히 강아지, 고양이 가리지 않고 예뻐라 해준다. 어쩌면 내가 냥이들에 대한 무서움이 사라진 것이 아들이 지나가는 냥이들을 쓰다듬어주고 예뻐하는 모습을 보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지난 주말에 만나서 고양이를 키울까 말까 고민 중이라고 말했더니 아들이 귀여운 목소리로 말한다. "엄마, 고민하지 말자~~"


고양이는 높은 물건도 떨어트리고 엄마가 좋아하는 식물들도 뜯어먹을 수도 있어서 그래도 고민이 된다고 하니까 우문현답이 돌아왔다. "그럼 물건 안 떨어트리고 식물도 안 뜯어먹는 냥이를 키우면 되지!" (응?)


 7살. 너 되게 단호하다? 아이와 함께 보내는 주말이 냥이로 인해 더욱 행복해질 것만 같다!



네번째. 산책대신 사냥놀이


강아지를 키울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직장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는 나와 같은 주인을 만나는 게 너무나 불쌍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퇴근하고 집에 들어오는 순간 밖에 다시 나가는 건 나에게 너무 힘든 일이다. 산책을 시킬 자신이 없어서 강아지를 키우지 못한다고 해도 내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냥이는 산책을 하지 않아도 되지만 대신 하루에 최소 30분은 사냥놀이를 해주어야 한다고 했다. 집안에서 하는 일이라면 자신 있었다. 현란한 손놀림으로 냥이에게 사냥의 기쁨을 한껏 안겨드리고야 말겠다.



다섯번째. 돌보는 일은 내게 기쁨을 주는 일


'돌봄'을 통해 나는 기쁨을 느끼곤 한다. 현재는 '냥집사'가 아니라 '식집사'로 살고 있다. 집의 규모에 비해 다소 거대한 고무나무와 몬스테라, 팔자 좋게 꽃은 안 피워내는 한량 동백이, 핫도그처럼 작았었지만 솜사탕만 해진 율마, 직장에서 방치되어 데려와 키우는 식물들까지! 고맙게도 죽지 않고 함께하고 있다. 물 줄 때를 놓쳐서 풀 죽어 있는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용서를 구하고 시원한 물을 듬뿍 주면 금방 쌩쌩해져서 고개를 드는 초록이들을 보면 그냥 행복하다. 무언가 살아있는 존재를 돌본다는 건, 황홀한 일이다. 노력도 들고 돈도 들고 시간도 들지만, 나에겐 '돌봄'이라는 행위 자체가 삶의 에너지를 부여해 주는 일이기에 '냥집사'의 길을 걸어도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엄격한(?) 자격검증의 시간을 거치고 스스로 내가 고양이를 키워도 될 상이라 결론지었다. 다만 한 가지... 반려동물을 키우려면 경제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 열심히 벌어야 할 이유가 또 하나 생겼다! 나의 소울 푸드인 떡볶이와 비싼 복분자주도 덜 먹으며 소소한 금전을 냥이에게 양보하려 한다. 나의 소울을 나누어 냥이에게 바친다.


냥이, 넌 이제 내 영혼의 동반자야♡

꾸미랍니다!

* 반려고양이인 ‘꾸미’와의 첫 만남은 2편에서 만나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