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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후의 여행 Oct 11. 2022

Hola 쁠라야 히론!  Adios 아바나!

쿠바, 쁠라야 히론, 아바나


뜨리니다드에서부터 타고 온 택시는 우리를 마을 한가운데 내려주고 떠난다. 쁠라야 히론(Playa Giron)이다. 조용하다. 지나가는 사람도 높은 건물도 보이지 않는다. 마당이 있는 단층집들이 드문드문 보일 뿐이다. 한국 여행자들의 칭찬 일색인 까사에는 역시, 빈 방이 없다. 다행히 근처에 깔끔해 보이는 까사가 있다. 숙소에 짐을 풀고, 쉬고 있으니 핸드폰에서 신호 연결음 소리가 난다. 인터넷이 된다. 뜻하지 않게 쿠바에서 최고의 숙소를 시골 마을 쁠라야 히론에서 만난 셈이다. 쿠바에서 인터넷이 된다는 것은 횡재 중의 횡재이니 말이다.


우리는 Mapsme 오프라인 지도를 다운로드한 핸드폰만 들고 가벼운 마음으로 산책을 나선다. 걸어서 10분 거리에 바다가 있다기에 석양을 보자며 나선 길이다. 시골 냄새가 난다. 바다로 향해 있는 도로는 차가 없어 휑하다. 도로 끝에서 마차가 오고 있다. 말발굽 소리가 경쾌하다. 마차에는 한 무리의 여행자들이 타고 있다. 우리는 서로를 향해 손을 흔들며 스쳐 지나간다.

“Hola! Amigo!”

무의식 중에 'hola'라는 인사가 나오는 것이, 어느새 남미 여행이 익숙해지고 있다.



파도치는 바다는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는다. 해가 지고, 파도의 포말 색이 선명하게 두드러지기 시작한다. 사방이 어두워졌다.  

불빛이 하나도 없다. 핸드폰의 플래시 빛에 의지해 숙소로 향한다. 외길을 따라왔기에, 그 길을 되짚어가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캄캄해도 너무 캄캄하다. 밤이 캄캄한 것은 당연한데 낯설다. 생각하니, 인공의 불빛 하나 없이 온전히 캄캄한 밤을 본 기억이 없다.

너무 캄캄해서 시간의 흐름조차 가늠이 되지 않는 걸까. 한참을 걸은 것 같은데, 인가가 나오지 않는다. 희미해진 핸드폰의 플래시 불빛을 멀리 비추니, 사방으로 길게 뻗은 도로가 어렴풋이 보인다. 외길을 따라왔다고 생각했는데 둘러보니, 사방이 길이다.

길 위에서 길을 잃어버렸다!

핸드폰 배터리는 방전 직전이다. Mapsme 지도를 켜도 우리의 위치를 찾을 수 없다.

당황하면 안 된다. 어른이 당황하면, 아이가 겁을 먹게 된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모르기에 왔던 길을 되짚어 바다로 간다. 길을 되짚어가며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방파제를 보는 순간, 길을 잃은 이유를 알겠다.

바다를 보다, 방파제에 부딪히는 파도 소리에 이끌려 왼쪽으로 길을 꺾어 들어갔다. 파도를 오래 보고 있다 보니, 길을 꺾었다는 사실이 머릿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우리는 마치 세이렌의 노랫소리에 홀려 잡아먹힌 그리스 신화 속 어부들처럼 파도 소리에 홀려 길을 잃어버린 것이다.

우리가 쁠라야 히론에 온 이유는 올 인클루시브 해변을 즐기기 위해서다. 조용한 시골 마을에 올 인클루시브 해변이 두 개 있다. 푼타 페르디즈(Punta Perdiz)와 칼레타 부에나(Caleta Buena). 우리는 푼타 페르디즈(Punta Perdiz)로 정했다. 1인당 15cuc(약 18000원)으로 선베드 이용은 물론 식사와 음료가 무제한으로 제공된다.


푼타 페르디즈로 들어가자 신세계가 펼쳐져 있다. 투명한 바다가 비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여행 중 만난 최고의 바다다. 잔잔한 물결 아래 헤엄치는 물고기들이 그대로 보인다. 눈앞의 투명한 물빛을 따라 시선을 멀리 보내자 자연스레 코발트색으로 바뀐다. 컴퓨터 바탕화면에서 봄 직한 배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 컴퓨터 바탕화면 속 풍경으로 뛰어든다. 물고기들은 우리를 신경도 쓰지 않는다. 빵 조각을 주자 물고기들이 몰려든다. 물고기와 함께 물놀이를 즐기다, 모히또 한 잔을 손에 들고 선베드로 향한다. 나른하게 몸이 풀어진다. 여유롭다. 눈으로 대충 세어도 셀 수 있을 정도의 사람뿐이라 더 여유롭게 느껴진다. 오늘은 무거운 배낭은 잊어버리자. 시간에도 사람에도 돈에도 쫓기지 않는 진정한 휴가를 즐기는 거야!

해변에 버금가는 쁠라야 히론의 매력은 특별날 것 없는 평범함이 아닐까. 해 질 무렵 마을 산책을 하다 보니,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시골 마을을 걷는 듯한 착각을 하게 된다. 마차가 다니던 시절을 살아 본 적은 없지만, 드라마 속에서 가끔 보던 풍경이라 낯설지가 않다. 시골길을 걷다 아이스크림 가게와 피자 가게가 보이고 작은 레스토랑 앞 야외 테이블에서 술 한잔 즐기던 여행자들이 손을 흔들며 “Hola!”라고 외치면, 그곳이 번화가다. 지극히 평범함이 매력인 쁠라야 히론이다.

다시 아바나로 간다. 뜨리니다드, 산타 클라라, 쁠라야 히론 여행을 마치고 아바나로 들어서니, 고향으로 돌아가는 기분이다.

올드 아바나 골목엔 여전히 음악과 춤이 넘쳐흐르고 있다. 단골집에서 산 모히또를 들고 그림 그리는 친구에게 간다. 나를 본 친구는 반가움과 놀람을 동시에 드러내며 표정을 감추지 않는다. 단골집이 있고, 친구가 있으니 아바나를 우리 동네라고 불러도 영 틀린 말은 아니지 싶다.

우리는 거의 매일 해 질 무렵이면 말레꼰에 앉아 석양빛이 물든 모로 요새를 보았다. 오늘은 석양빛으로 들어가 보자며 말레꼰에서 모로 요새로 가는 버스에 오른다. 각자의 하루를 마친 이들이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라 설 자리도 겨우 잡을 수 있을 정도로 사람이 많다. 이 버스 안에서 우리는 진정한 이방인이다. 그래서 더 설렌다.

멀리서 실루엣으로만 보던 모로 요새는 생각보다 규모가 크다. 요새 끝에 서니 바닷가 절벽에 서 있는 듯하다. 해지는 곳을 바라보며 앉아 있는 사람들 틈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노을빛에 물드는 모로 요새처럼 우리도 노을빛에 물들고 있겠지.

밤새 아이 열이 내리지 않는다. 살다 보면 아프기도 한다. 여행 중이라고 다르지는 않다. 39도가 넘는 열은 4시간 간격으로 먹인 타이레놀로는 내리지 않는다. 여행자 단톡방에 SOS 톡을 넣고 기다려도 별 뾰족한 수가 없다. 약국이 있다는 정보를 보고 찾아간 약국에서는 해열제를 팔지 않는다. 멕시코에서 아이를 만난 적이 있는 여행자들이 걱정과 위로의 안부를 남긴다. 온라인을 타고 전해오는 말들이 따뜻하다.

반나절을 헤맨 끝에 찾은 병원에서 진료를 받고 주사를 맞는다. 병원 시설과 의료진의 옷차림만 보고는 병원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의사와 간호사가 일반복 차림을 하고 있기 때문이며, 무엇보다 병원에 환자가 없다. 수납하려니, 무료라고 한다. 쿠바는 사회주의 국가이기에 의료비가 무료이다. 성인 외국인의 경우는 외국인 병원이 따로 있고 물론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하지만 아동의 경우는 어느 병원이나 이용 가능하며 무료라고 한다. 쿠바의 사회주의를 병원에서 만난 기분이다. 고열은 아니지만 계속되는 미열이 걱정되어 다시 병원에 간다. 주사 처방은 내려졌으나, 주사약이 없다. 의사는 주사약이 없다며, 해열제를 내민다. 쿠바의 물자 부족은 병원도 예외가 아니다.

아바나에서 우리는 말 그대로 여행생활자이다. 장을 보고, 밥을 하고, 숙소의 여행자들과 도미노 게임을 즐기고, 동네 아이들과 그림을 그리며 놀기도 한다. 어슬렁거리며 할 일 없는 듯 돌아다니다, 해가 지면 말레꼰으로 가는 골목으로 들어선다.

이젠, 쿠바를 떠나기에 친구에게 작별 인사를 해야 한다. 우리 사이에 그 정도의 우정이 생겼다. 친구의 얼굴이 쓸쓸해진다. 나 역시 같은 표정이다.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너는 안 되겠지. 그러나 너의 딸은 또 올 수도 있지. 만약 너의 딸이 다시 왔을 때 이곳에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면, ‘아저씨 저를 기억하시나요?’라고 물을까? 그러면 난 기억을 할까?”

이런 대화 끝에 둘 다 코끝이 찡해지는 것이 어색해 웃으며 가볍게 돌아선다.

“Adios!”

“Adios!!”



“Lisa(딸아이 영어 이름), 난 네가 부러워. 나도 한국에 가고 싶고 일본도 가고 싶어.”라고 말하던 살사 선생님의 쓸쓸한 얼굴이 오버랩된다.

가볍게 며칠 즐기다 갔으면 보지 못했을 쿠바의 숨은 얼굴이다. 내가 본 쿠바의 숨은 얼굴도 극히 일부라는 것을 안다. 한 달도 채 머물지 않은 곳의 진짜 얼굴을 알 수는 없다. 하지만, 거주이동의 자유가 없어 자신이 원하는 곳에서 살 수가 없고, 여행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뒤, 호기롭게 온 가족이 세계여행을 떠나왔노라며 내뱉은 말이 그들에게 상처가 되었을 거란 생각에 마음이 불편하다. 때로는 자랑도 상대방을 찌르는 칼이 된다는 말을 잊고 있었다. 이런 값싼 감상도 가진 자의 오만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덧대어진다.



‘쿠바’라는 나라를 떠올리는 순간 부에나 비스타 소셜클럽의 ‘Chan Chan’이 내 속에서 흐른다. 예외 없이 코끝이 찡해진다. 쿠바는 어쩐 일인지 자꾸 뒤돌아보게 되는 이상한 나라다.

‘내가 이곳에 다시 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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