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ction. 사랑
늦은 겨울밤이었다.
시골 동네 거리는 이미 어두웠고, 눈 위에 남아 있던 발자국들도 하루가 지나며 거의 지워져 있었다.
공중전화부스의 불빛만이 조용히 거리를 비추고 있었다.
남자는 그 앞에 한참을 서 있다가 동전 하나를 꺼냈다.
손바닥 안에서 동전은 이미 식어 있었다.
금요일에 본가로 내려왔다.
학교에서 그녀를 본 뒤였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각자 다른 방향으로 걸어갔던 그날 이후 토요일 하루가 통째로 남아 있었다.
말을 걸까 말까,
지금 전화해도 될까 말까,
괜히 부담을 주는 건 아닐까.
그 생각만으로 하루가 다 지나갔다.
그러다 그는,
지금 낼 수 있는 최고의 용기를 한 번 써보기로 했다.
결국 밤이 되어서야 동전 몇 개를 주머니에 넣고 집을 나섰다.
신호음이 울리는 순간부터
“여보세요”라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기까지,
그 시간은 이상하게도 영원처럼 길게 느껴졌다.
통화는 어색하게 시작됐다.
몇 마디 일상적인 말이 오갈수록
남자의 마음은 더 조급해졌다.
“추워. 어서 들어가.
여긴 눈이 많이 와.”
수화기 너머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나도 안 추워.
조금 있다가… 응, 여기도 많이 와.”
남자는 집에서 입던 옷을 대충 겹쳐 입고
맨발에 슬리퍼를 신은 채 나와 있었다.
발바닥으로 눈의 차가움이 느껴졌지만
그는 그 감각을 애써 무시했다.
지금은 그보다
수화기를 쥔 손이 더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같은 대학에 다니는 사람이었다.
소개팅으로 한 번 만난 사이.
아는 얼굴.
아직은, 모르는 마음.
그는 재미있는 말을 해서 그녀를 웃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말을 고를수록 입은 더 무거워졌다.
침묵이 길어질 때마다
괜히 수화기를 고쳐 잡았다.
그는 월요일 이야기를 꺼낼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그때… 시간 괜찮으면, 혹시 점심이라도…’
말들은 머릿속에서만 몇 번이고 맴돌다가
혀끝에서 다시 접혔다.
“내일 일요일인데,
고향 친구들 안 만나?”
“어… 안 만나.
나 하루 종일 집에 있을 거야.”
말을 하고 나서야
그는 스스로를 책망했다.
당황해서 튀어나온 말이라는 걸
자기만 알고 있는 것 같아서
괜히 부끄러워졌다.
수화기 너머에서 그녀가 작게 웃었다.
그 웃음이
마음을 조금 풀어놓게도,
다시 조여오게도 했다.
잠시, 아주 짧은 침묵.
그리고 그녀가 물었다.
“너희 집에서 학교까지 얼마나 걸려?
한… 두 시간?”
그 질문은 너무 자연스럽게 흘러나와서
남자는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그저 대답하면 되는 말처럼 들렸다.
“응. 그 정도.”
“그래? 그렇구나.
일찍 와.”
그 말은 아주 가볍게 던져졌는데
남자는 그 가벼움을 그대로 믿어버렸다.
그래서 그는 그 말을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응.
보통 아침 일곱 시 기차 타.”
수화기 너머에서 그녀가 짧게 웃었다.
“그래. 일찍 와!
추운데 어서 들어가. 알았지?
이만 끊자.”
“어… 잘 자.”
“응, 너도.”
전화는 그렇게 끝났다.
남자는 수화기를 귀에 댄 채
한동안 그대로 서 있었다.
공중전화에서는 전화를 내려놓으라는 안내음이 흘러나왔지만
그 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다.
조금 전 그녀의 말이
머릿속에서 다시 울렸다.
“일찍 와.”
그 말의 끝에는
‘학교에’도,
‘수업 전에’도 없었다.
그제야 남자는
그 질문이 시간을 묻는 말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설명이 아니라,
자신을 부르는 말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월요일에 만나자는 말을
자기가 꺼내지 않아도 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갑자기 가벼워졌다.
숨이 짧아졌다.
심장이 이유 없이 빨라졌다.
남자는 급히 수화기를 내려놓고
부스 밖으로 뛰어나왔다.
눈은 제법 쌓여 있었고
이웃집 처마 끝에는 고드름이 길게 매달려 있었다.
그날이 얼마나 추웠는지는
그 고드름이 대신 말해주고 있었다.
맨발에 눈이 들러붙었지만
남자는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허공에 손을 휘두르며
집 쪽으로 뛰어갔다.
세상은 이렇게 차가운데,
자기 마음만
조금 먼저
사랑 쪽으로 달려가고 있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