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야(白夜)

제3화 열 권의 책, 그리고 ,,

by 천재손금


다음 날부터 자영은 반납대를 정리할 때마다 주변을 살폈다. 그 남자가 다시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으려 애썼다.
이틀. 사흘. 남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자영의 마음은 점점 불안 쪽으로 기울었다.
이게 착각이면, 자영은 괜한 상상으로 규정을 넘을 뻔한 사람이 된다. 그런데 착각이 아니라면—도서관에 남겨진 그 얇은 흔적은 누군가가 끝내 입 밖으로 못 낸 말일지도 모른다.
자영은 그 두 가지 사이에서 계속 같은 문장만 되뇌었다. 분실물이면 다행이다. 다행이라는 말은 원래 사람을 놓아줘야 하는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자영을 더 붙잡았다.
자영은 결국 ‘회원 정보’라는 단어가 적힌 메뉴를 한 번 열어놓고, 그대로 손을 떼었다. 화면은 켜져 있는데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이건 명백한 규정 위반이었다.
자영은 스스로에게 말했다. 아직은 아니야.
하지만 동시에, 더 작은 목소리도 들렸다. 그래도… 만약이라면.
자영은 창을 닫지 못한 채, 그 앞에서 한참을 멈춰 있었다.​
자영은 ‘왜’가 필요했다. 그래야 이 멈춤이 변명으로 끝나지 않는다. 스스로를 설득할 만큼 단단한 이유가 있어야 했다.
그 남자가 다시 오지 않으면, 이 흔적은 그냥 분실물로 끝난다. 분실물이면 괜찮다. 그런데 혹시—혹시 이게 누군가가 끝내 못 한 신고라면.
자영은 그 가능성 하나 때문에, 화면을 닫지 못했다.​
자영은 일단 선을 하나 낮췄다. 회원정보가 아니라 대여자 관리 메모부터 확인했다. 연체 관련 특이사항이나 대리 반납 요청 같은, 업무상 공유되는 짧은 기록. 도서관에서는 종종 이런 메모가 붙는다.
‘장기 부재 예정’ 같은 말 한 줄만 있어도, 연체 처리 방식이 달라지니까.
그 아래쪽에 작은 메모가 보였다.
‘입영 예정 — 보호자 요청으로 연체 처리’
자영은 그 문장을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입영’이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는 곳에 너무 또렷하게 박혀 있었다.​
입영. 연락이 끊기는 가장 확실한 이유. 그 확실함 때문에 오히려 더 의심스러웠다.
그래도 아직은 회원정보 조회를 할 이유가 없었다. 자영은 스스로에게 말했다. ‘여기서 멈추자. 메모만으로도 충분히 이상하다고 느끼는 건 과해.’
하지만 퇴근 무렵, 반납함에서 『백야행』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이번에도 책은 반듯하게, 모서리 하나 틀어지지 않게 들어 있었다. 자영은 책을 꺼내 들고도 한동안 반납함 앞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자영은 다시 화면 앞에 앉았다. 이번에도 바로 클릭하지 못했다. CCTV가 있는 방향을 한 번 보고, 옆자리 동료가 전화받는 소리에 귀를 세웠다. 손바닥에 땀이 났다.
조회 버튼을 누르자 작은 팝업이 떴다.
‘개인정보 열람 사유를 선택하십시오.’
사유 목록이 길게 늘어섰다.
자영은 한 줄, 한 줄을 읽다가 손끝이 더 느려졌다. 여기서부터는 ‘업무’라고 말하기 어려웠다.
자영은 스스로에게 조건을 붙였다. ‘번호는 저장하지 않는다.’ ‘연락도 하지 않는다.’ ‘정말 아무것도 아니면, 여기서 멈춘다.’
사유를 하나 선택하고 직원 비밀번호를 다시 입력했다. 키보드를 치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자영은 마지막으로 화면 구석의 문구를 보았다.
‘열람 기록은 저장됩니다.’
마우스를 클릭했다.
회원 정보가 떴다. 이름. 주소. 연락처. 자영은 화면을 한참 바라보다가 메모지에 번호만 적었다. 손이 조금 떨려 숫자가 비뚤게 적혔다.
며칠 뒤, 자영은 한 번만, 딱 한 번 만이라고 다짐하며 전화를 걸었다. 양심이 허락한 마지막 선이었다.
“지금 거신 번호는—”
해지된 번호였다.
자영은 통화 종료 화면을 한참 바라보다가 천천히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대여 기록 화면을 다시 열었다. 메모 아래에 입영 날짜가 적혀 있었다. 초콜릿과 『백야행』을 반납했던 바로 다음 날이었다.
자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가 3월 23일 이후 빌려갔던 책들을 다시 찾아 나섰다. 열 권. 제목도 분야도 제각각인, 그 이상한 목록.
먼저 손이 간 건 반납대가 아니라 열람실 쪽 반납함에 쌓여 있던 책들이었다. 자영이 직접 받은 게 아니니, 페이지를 훑을 기회도 없었던 책들.
그중 목록과 맞는 한 권을 꺼내 들고 책장을 넘기며, 습관처럼 가운데쯤을 한 번 털었다. 그 순간, 아주 얇게 접힌 종이 하나가 툭 떨어졌다.​
군 입영 안내문이었다. 접힌 자국 옆에는 볼펜으로 짧게 선이 그어져 있었다. 날짜. 그리고 그 옆에 아주 작게 적힌 글씨.
‘그전에.’
자영의 등이 서서히 굳었다.
입영 안내문을 쥔 채로 자영은 잠깐 멈췄다. ‘그전에.’라는 글씨가 손끝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자영은 숨을 한번 고르고, 다시 목록으로 돌아갔다. 남은 책들. 3월 23일 이후에 빌려간 책들을 전부 찾아야 했다. 한 권만으로는 우연일 수 있고, 열 권이 모이면 우연이 아니다.
하지만 책은 생각처럼 한꺼번에 모이지 않았다. 어떤 책은 아직 반납되지 않았고, 어떤 책은 예약자가 걸려 바로 빼낼 수 없었다. 몇 권은 다른 직원이 처리해 이미 서가로 들어가 있었고, 어떤 책은 분실 처리 직전이라 위치가 애매했다.
자영은 도서관의 ‘정상적인 흐름’이 오늘만큼은 원망스러웠다. 책들은 늘 자기 자리를 찾아가지만, 자영이 찾는 건 책이 아니라 책 사이에 남겨진 것이었으니까.​
그날 이후로 자영은 업무가 자꾸 ‘업무’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바코드를 찍다가 삑 소리가 한 번 더 나면, 아무 이유 없이 심장이 먼저 움찔했다. 책을 반듯하게 맞춰놓는 손이 오늘따라 자꾸 어긋났고, 서가를 정리하다가도 머릿속은 계속 ‘남은 책들’의 위치를 되짚었다.
자영은 자신이 지금 뭘 하고 있는지 들키지 않으려고, 오히려 더 평소처럼 행동하려 애썼다. 그런데 그럴수록 손끝이 말을 듣지 않았다.
“자영 씨, 무슨 일 있어요?”
옆자리 동료가 물었을 때 자영은 반사적으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냥… 잠을 좀 못 자서요.”
거짓말이었다. 잠은 잤다. 다만 자영이 자는 동안에도 머릿속은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그 뒤로 며칠이 걸렸다. 한 권을 찾으면 또 한 권이 비어 있었고, 반납이 들어오면 바로 달려가 확인해야 했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모았다.
열 권이 모두 책상 위에 놓였을 때, 자영은 한참을 손을 올려두고 움직이지 못했다. 손바닥이 차가웠다. 종이 냄새가 진하게 올라왔다.​
자영은 첫 번째 책을 펼쳤다. 아무것도 없었다.
두 번째도, 세 번째도 마찬가지였다.
깨끗했다. 너무 깨끗해서, 오히려 시간이 보였다. 누군가 망설이고 지나간 자리, 손이 멈췄다가 다시 움직인 자리 같은 것들이 책장 사이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네 번째 책에서 작은 종이가 떨어졌다.
영어 한 줄.
SHELF / 1-10
다섯 번째 책.
일본어 한 단어.
ひだり
왼쪽.
여섯 번째 책.
숫자 세 개.
110
일곱 번째 책.
다시 숫자.
468
여덟 번째 책.
LOCK.
아홉 번째 책은 자영이 이미 한 번 확인했던 책이었다. 그날 ‘툭’ 떨어졌던 접힌 종이—군 입영 안내문—이 아직도 선명했다.
자영은 책장을 다시 한 번 넘겨보며, 그때 메모해 둔 날짜와 ‘그전에’라는 글씨를 떠올렸다. 새로 나온 건 없었다. 대신 그 문장이 더 무거워졌다. 그전에. 언제까지를 말하는 걸까.
열 번째 책. 자영은 이번엔 더 조심스럽게 끝부분을 펼쳤다.
아주 얇은 쪽지가 나왔다.
THAT NIGHT
그날 밤.
그리고 책 속에 종이가 한 장 더 끼어 있었다.
MARCH 22
3월 22일.
자영은 메모지 위에 단어들을 쓸어 담듯 적었다.
SHELF / 1-10
ひだり(왼쪽)
110
468
LOCK
THAT NIGHT
MARCH 22
적는 동안에도 마음은 조금도 가벼워지지 않았다. 맞춘 퍼즐이 아니라, 일부러 흩어놓은 조각들 같았다.
자영은 먼저 ‘SHELF’를 도서관 맥락에서 풀어봤다. 서가. 1-10은 서가 번호일 수도, 분류기호 범위일 수도 있다. ‘왼쪽’도 도서관 안이라면 방향을 말하는 걸 수 있다.
그런데 “LOCK”이 걸렸다. 잠금. 도서관에서 ‘잠금’이 붙는 장소가 어디였더라. 자영은 메모지의 그 단어 위에 펜 끝을 잠깐 올려두었다.
110과 468은 더 애매했다. 110은 번호 같고 468은 비밀번호 같기도 했지만, 도서관에서 번호가 붙는 것은 너무 많았다. 서가 번호일 수도 있고, 문서함일 수도 있고, 열쇠고리일 수도 있었다.
자영은 확신을 만들지 않기로 했다. 지금 필요한 건 답이 아니라, 답을 만들어낼 근거였다.
그날 밤, 자영은 집에 와서도 도서관의 구조를 머릿속에서 다시 그렸다. 1번부터 10번까지 길게 늘어선 라인. 사람들이 가장 자주 지나가는 구역. 그리고 왼쪽 끝.
어느 순간부터 자영은 ‘단서’를 푸는 게 아니라, 도서관 자체를 다시 걷고 있었다.
다음 날 출근하자마자 자영은 문학 서가 쪽으로 걸어갔다. 1번 서가부터 10번 서가까지, 그 라인은 확실히 가장 길게 늘어선 곳이었다.
‘왼쪽’은 그 라인의 왼쪽 끝을 말하는 걸까. 자영은 일부러 천천히 걸었다. 누군가에게 보일까 봐가 아니라, 스스로를 진정시키기 위해서였다.
서가 1-10 라인의 가장 왼쪽 끝에는 작은 창고 문이 있었다. 사람들이 잘 보지 않는, 그래서 오히려 ‘숨길 만한’ 문.
자영은 문 앞에 서서 숨을 한 번 고르고 문 옆 벽을 훑었다. 안내문들이 빽빽하게 붙어 있었다.
그 순간 자영은 생각했다. 남자가 남긴 게 단서라면, 단서는 ‘종이’로만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 누군가가 떼어내거나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면—붙이지 않고 끼우는 방식이 필요하다.
자영의 서랍 속에 있던 그 투명 필름이 떠올랐다. ‘어딘가에 붙어야만 의미가 생기는 것’ 같은, 이상한 재질.
창고 문 옆에는 하얀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대여 도서 분실 시 보상 기준 안내”
코팅지 아래쪽이 아주 조금 들떠 있었다. 눈으로는 거의 티가 나지 않았지만, 자영에게는 이상할 정도로 또렷했다.
자영은 서랍에서 그 투명 필름을 꺼냈다. 손톱 대신, 종이 대신, 흔적 대신. 필름을 코팅지와 벽 사이로 아주 얇게 밀어 넣자, 들떠 있던 코팅지가 거의 들리지 않는 정도로 떠올랐다.
그 틈 사이로 작은 스티커가 보였다.
Madu / Locker
자영은 숨을 삼켰다.
테이프가 아니라 필름. 남기되, 흔적은 남기고 싶지 않은 방식. 그리고 도서관이라는 곳을 ‘발견’의 장소로 고른 선택. 이 모든 게 누군가의 손끝에서 계산된 것처럼 느껴졌다.
자영은 메모지로 돌아가 다시 읽었다. Madu / Locker. 사물함.
그 순간 110은 ‘서가’가 아니라 ‘사물함 번호’ 쪽으로 기울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부터였다.
도서관 안에는 사물함이 없었다. 밖이라면—역, 터미널, 건물 로비… 너무 넓었다. ‘Madu’가 지명이라 해도, 어디의 무엇인지가 남았다.
자영은 스스로에게 말했다. 여기서부터는 억측이 된다.
468은 더 불쾌했다. 숫자 셋이 나란히 놓여 있다는 사실만으로는 아무것도 확정할 수 없었다. 번호일 수도 있고, 순서일 수도 있고, 날짜나 시간의 일부일 수도 있었다.
자영은 메모지 위에 468을 몇 번이나 다시 적었다가 지웠다. 이게 뭘 뜻하지.
그런데 바로 옆의 “LOCK” 때문에 생각이 자꾸 한 방향으로 흘렀다. ‘잠금’이라면 언젠가 이 숫자들을 입력하는 순간이 온다. 하지만 셋만으로는 어딘가 모자랐다. 앞자리가 더 붙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끝까지 지워지지 않았다.​
자영은 그날도 퇴근 후 침대에 누웠다가 몇 번이나 몸을 일으켰다. 메모지를 펼쳤다 접고, 다시 펼쳤다. ‘마두’라는 두 글자가 머릿속에서 맴돌다가도, 근거 없이 단정하는 순간 스스로가 싫어졌다.
자영은 결국 메모지를 서랍 깊숙이 넣었다.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자영은 같은 자리에서 멈췄다. 도서관 안쪽까지는 왔는데, 마지막 문 앞에서 발이 떨어지지 않는 느낌.
그렇다고 완전히 놓을 수도 없었다. ‘혹시’라는 단어가 사람을 붙잡는 방식은, 생각보다 단단했다.
새벽이 가까워지기 전, 자영은 결국 주영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이번엔 날짜를 묻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혼자서 더 이상 이어 붙이지 못하는 빈칸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언니… 나야.”
자영은 목소리를 낮췄다. 새벽에 전화하는 이유가 ‘급한 일’이 아니라는 걸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끊을 수가 없었다.
“그 ‘백야’ 사건… 아직도 그대로야?”
주영은 잠깐 숨을 고른 뒤, 짧게 말했다.
“그대로야. 오리무중.”
자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혹시 목격자 같은 사람은 없어?”
주영이 아주 짧게 숨을 내쉬었다.
“있었지. 처음엔 있었어.”
주영은 말을 고르듯 잠깐 멈추고 이어갔다.
“어떤 사람이 전화해서는 ‘내가 봤다’고 했거든. 근데 이상한 게… 굳이 사무실로, 그것도 내 내선으로 들어오더라. 내가 누군지까지 정확히 찍어서.”
주영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어떻게 그 번호를 알았는지 모르겠어. 누가 연결해 줬는지, 어디서 알아냈는지도.”
주영은 한 박자 쉬었다.
“그리고 그 뒤로는 연락이 없어. 말만 던지고 사라졌어.”
자영은 메모지를 한 번 더 펼쳤다. 종이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통화 사이로 새어 나갈 것 같아 손가락에 힘을 줬다.
“언니, 내가 지금까지 말 안 했는데… 도서관에서 단서 같은 걸 찾았어. 그리고 그게, 언니가 말한 ‘백야’ 사건이랑 날짜가 겹치는 것 같아.”
자영은 숨을 고르고, 주영이 이미 알고 있는 지점부터 짚었다.
“언니, 전에 말했잖아. 『백야행』 반납됐을 때 초콜릿이랑 같이 나온 그 투명 필름. 그거.”
“나는 그걸 그냥 분실물처럼 처리하려고 했는데, 계속 마음에 걸렸어.”
“그래서 그날 이후로 그 남자가 빌렸던 책 열 권을 하나씩 모았어. 며칠에 걸렸고.”
“책들 사이에서 쪽지가 조금씩 나왔고, 나는 그걸 메모했어.”
자영은 메모지에 적힌 걸 그대로 읽었다.
“SHELF / 1-10. 왼쪽. 110. 468. LOCK. THAT NIGHT. MARCH 22.”
주영 쪽에서 숨이 한 번 멎는 소리가 났다. 이번엔 피곤이 아니라 계산이었다.
“잠깐. 지금 네가 말한 것들… 전부 책에서 나온 거야?”
“응. 열 권에서 조금씩.”
“좋아. 그럼 ‘필름’은?”
“필름은 책에서 나온 거 하나랑, 내가 그걸로 확인해 본 게 있어.”
“뭘 확인했는데.”
“도서관 창고 문 옆에 붙은 안내문 있잖아. 코팅지가 아주 조금 들떠 있었어. 그 틈에 필름을 밀어 넣었더니 안쪽에 작은 스티커가 있었어.”
자영은 목소리를 더 낮췄다.
“거기에 ‘Madu / Locker’라고 적혀 있었어.”
잠깐의 침묵. 주영이 곧바로 물었다.
“좋아. 그리고 네가 말한 날짜—‘MARCH 22’, ‘THAT NIGHT’—그건 책에서 나온 게 맞지?”
“응.”
주영은 숨을 한 번 고르고, 확정하듯 말했다.
“사건은 3월 22일 새벽이 맞아.”
주영은 곧바로 단정을 하지 않았다. 대신 확인부터 했다.
“쪽지들… 필체는 같아? 종이 재질도 같고? 접힌 방식도?”
“거의 비슷해. 얇고, 한 번 접혀 있고… 다 책 사이에서 떨어졌어.”
“좋아. 그러면 누가 일부러 ‘흩어놓은’ 건 맞는 쪽으로 기운다.”
주영은 말을 이어가며, 자영이 방금 읽어준 단어들을 다시 정렬했다.
“일단 ‘Madu / Locker’는 말 그대로 읽으면 돼. ‘Locker’는 사물함. ‘Madu’는… 지명일 가능성이 높고.”
자영이 급히 말했다.
“근데 도서관엔 사물함이 없잖아.”
“응. 그래서 ‘밖’이야. 역이나 공공장소.”
주영은 잠깐 멈추더니 덧붙였다.
“지금 확정은 아니고. 후보로만 두자.”
자영이 숨을 고르며 말했다.
“110이랑 468은 내가 거기서 막혔어.”
주영은 곧장 ‘LOCK’을 짚었다.
“‘LOCK’이 있다는 건, 누군가가 열어야 하는 뭔가가 있다는 뜻이야. 그럼 숫자는 보통 두 가지로 가. 번호 거나, 입력값.”
“110은 번호 같아.”
“나도 그렇게 보이네. 110은 사물함 번호. 그건 비교적 자연스러워.”
문제는 468이었다. 주영은 자영이 넘어오지 못한 지점을 그대로 밟지 않았다.
“468을 바로 ‘입력값’이라고 단정하지 말자. 대신 질문을 하나.”
“응.”
“‘MARCH 22’에서 굳이 ‘MARCH’를 영어로 써서 남긴 이유가 뭘까. 날짜를 알려주려면 3/22만 적어도 되잖아. 그런데 월을 단어로 떼어놨어.”
자영은 메모지를 내려다봤다.
주영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내 느낌은… ‘22’만 보지 말고 3월 자체를 보라는 신호일 수도 있어. 그러면 468 앞에 붙일 수 있는 가장 간단한 값이 3이야. 3468.”
자영이 낮게 되물었다.
“근데 이건… 맞춘 게 아니라, 우리가 만든 거잖아.”
“맞아.” 주영이 바로 인정했다.
“그래서 ‘정답’이 아니라 가장 가능성 높은 가설. 현장에서 한 번만 확인해 보고, 아니면 바로 접는 거야.”
주영은 결론을 서두르지 않으면서도, 행동은 정했다.
“지금 네가 혼자 움직이면 안 돼. 누가 보고 있을 수도 있고, 네가 단서를 건드리면 ‘누가 찾고 있다’는 신호가 될 수도 있어.”
주영은 짧게 못 박았다.
“자영아, 지금은 절대 움직이지 마. 너 혼자 판단해서 밖으로 나가면 안 돼.”
자영이 숨을 들이켰다.
“언니, 나…”
“들어.” 주영이 말을 끊지 않고 낮게 이어갔다.
“네가 적어둔 메모랑, 찍어둔 사진들. 원본 그대로 나한테 보내. 그리고 필름도 따로 보관해. 내일 아침 내가 팀이랑 같이 볼게.”
주영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말했다.
“오늘은 그냥 자. 내가 확인하고 아침에 연락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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