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야(白夜)

제2화 확인이라는 문

by 천재손금



자영은 스스로를 타이르듯 도서관 정보 시스템을 켰다.


“그냥 확인만 하자.”


확인이라는 말은 늘, 한 번 더 들어가는 문이었다.
그 남자의 대여 이력은 깔끔했다. 3월 21일, 첫 대여. 그리고 3월 23일 이후 이틀에서 사흘 간격으로 이어진 열 권.
자영은 화면의 날짜들을 따라가다가, 문득 현실의 장면들이 같이 떠올랐다. 저 기록들이 쌓이는 동안 그는 분명 몇 번이고 카운터 앞에 섰다. 바코드를 찍는 소리, 책을 내려놓는 각, 손이 빠지는 속도—자영은 그런 것들로 그를 기억했다.


그런데 그때마다 그는 오늘처럼 말을 하지 않았다. “반납이요” 같은 최소한의 말조차 없을 때가 더 많았고, 초콜릿 같은 건 더더욱 없었다. 늘 조용히, 정확히, 필요한 절차만 남기고 사라졌다.


그래서 오늘이 이상했다. 말이 붙었고, 봉투가 붙었고, ‘잘 부탁드립니다’ 같은 문장이 붙었다. 그 변화가—호감의 변화가 아니라—어딘가 계획된 순서처럼 느껴졌다.​
자영은 목록을 내려보다가 멈췄다. 제목들이 한 번에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외국어 원서도 있었고, 전공서처럼 두꺼운 책도 있었고, 분야도 뒤죽박죽이었다. 보통은 취향이 보인다. 그런데 이건 취향이 아니라 ‘필요’처럼 보였다. 누군가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일부러 서로 다른 얼굴을 고른 것처럼.


자영은 속으로 한 번 더 되뇌었다.
‘호감 하나 전하려고 온 사람이 굳이 이렇게까지 시간을 들일까.’
초콜릿은 오늘 하루의 장식일 뿐이고, 핵심은 열 권이었다. 자영은 그제야 불편함의 결을 조금 더 정확히 잡았다. 그는 도서관이라는 공간을 이해하는 사람 같았다. 책이 사람을 거치며 남기는 흔적이 어떻게 전달되고 지워지는지, 무엇이 “붙고” 무엇이 “끼워지고” 무엇이 “남는지”를 어쩐지 너무 잘 아는 사람처럼.​


자영은 목록을 다시 위에서부터 읽었다. 이상하게도 책들이 ‘읽기 위한 순서’로 모인 게 아니라, 움직이기 위한 선택처럼 보였다. 누군가 눈에 띄지 않게 오래 머물 수 있는 책, 서가 깊숙이 가도 어색하지 않은 책, 대여해도 의심받지 않을 책.
그게 과한 해석일 수도 있다는 걸 자영도 알았다. 하지만 오늘의 ‘말’과 ‘봉투’가 붙는 순간부터, 기록은 단순한 기록으로만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자꾸, 그 투명 필름이 끼어들었다. 글을 담는 물건이 아니라 어딘가를 건드리기 위한 재질. 이 목록과 직접 연결된다는 증거는 없었다. 다만 둘이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다는 느낌—남기되, 최대한 흔적 없이 남기려는 방향—만이 자영을 불편하게 했다.​


자영은 문득 생각했다. ‘이건… 나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내가 사서라서 온 걸까?’
확신은 아니었다. 다만 추측이 점점 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사서는 누군가가 남긴 것을 가장 먼저 만지는 사람이다. 반납된 책을 펼쳐 확인하고, 끼워진 것을 찾아내고, 우연처럼 남겨진 것들을 ‘업무’라는 이름으로 발견해 내는 사람.
도서관은 그래서 이상한 곳이다. “남기고 싶지만 직접 남기긴 두려운 것”을 가장 안전하게 놓아둘 수 있는 곳. 결국 누군가가—사서가—찾아낼 것을 알고 있는 곳.


자영은 서랍 속 초콜릿을 떠올렸다. 선물이라기보다 시선을 한 번 붙잡아두기 위한 장치. ‘잘 부탁드립니다’는 고백이라기보다… 부탁의 방향이 이상한 문장이었다. 자영은 아직 그 ‘부탁’이 뭔지 모른 채로, 다만 그 문장이 자기 손을 향해 있다고 느꼈다.
그리고 자영이 더 싫었던 건, 그 생각이 꽤 그럴싸하다는 점이었다.​


그 생각을 붙잡고 있자니, 자영의 머릿속에는 어젯밤 주영의 목소리가 다시 떠올랐다. “백야…” 하고 입안에서 한 번 굴리다 끝내 삼켜버리던 그 단어.
『백야행』의 책 등, 서랍 속 필름, 그리고 “잘 부탁드립니다.”까지. 각각은 따로 놓이면 별일 아닌데, 오늘은 자꾸 한 줄로 이어지려 했다.


자영은 그게 싫어서 손을 움직였다. 생각이 더 뻗기 전에, ‘업무’ 쪽으로 몸을 돌리듯. 서랍을 닫고, 화면을 켜고, 기록을 확인하는 쪽으로. 그렇게 하면 적어도—지금 이건 상상이 아니라 확인이라고 말할 수 있으니까.​
자영은 스스로에게 말했다. ‘연결하지 마. 연결은 상상이야.’ ‘상상은 제일 먼저 버려야 하는 거야.’ 그런데도 마음은 이미 한 번 건너가 있었다. 『백야행』의 ‘백야’와 주영이 삼킨 그 ‘백야’ 사이를.


그래도 마음은 마음대로 움직였다. 자영은 통화 목록에서 ‘주영’을 찾았다가 손을 멈췄다. 언니에게 또 사건 이야기를 꺼내면 언니는 더 피곤해질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자영이 가진 건 ‘불편함’뿐이었다. 불편함을 근거로 사건 날짜를 캐묻는 건, 자영 자신이 싫어하는 종류의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


그날 밤, 자영은 침대에 누웠다가 몇 번이나 몸을 일으켰다. ‘그 남자.’ ‘필름.’ 『백야행』. 3월 21일. 그리고 23일 이후. 그 목록이 머릿속에서 계속 반납되고, 다시 대여됐다.
새벽 1시가 조금 넘어 자영은 결국 주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 번만, 딱 한 번만. ‘확인만 하자’고 스스로를 달래면서도, 사실은 안부가 더 컸다. 요 며칠 주영의 목소리가 계속 걸렸다.


“언니, 자?”


잠깐 숨을 삼키고 자영이 덧붙였다.
“미안… 늦은데. 근데 그냥, 목소리 한번 듣고 싶어서.”


“자영아?”


주영의 목소리는 잠이 덜 깬 소리가 아니었다. 오래 깨어 있다가 겨우 눕힌 사람의 소리였다.


“무슨 일인데. 너 무슨 일 있어?”


자영은 그 질문이 더 무서웠다. ‘내가’ 무슨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언니가 이미 무슨 일 속에 있다는 걸 들키는 것 같아서.


“나… 별일은 아닌데.”
“별일 아니면 이 시간에 전화 안 해.”
주영이 낮게 말했다. “너 지금 어디야.”
“집. 언니는… 오늘도 못 들어온 거야?”
“응. 아직.” 짧게 끊는 대답이었다. “왜, 무슨 일.”


자영은 바로 본론을 꺼내지 못했다. 자기가 느낀 ‘찜찜함’을 말로 꺼내는 순간, 그게 진짜가 되어버릴 것 같았다.


“언니, 그냥… 요즘 괜찮아? 밥은 먹어?”
“자영아.” 주영이 한 번 이름을 불렀다. 피곤이 섞인, 하지만 다그치진 않는 목소리. “말해.”


자영은 숨을 고르고, 결국 자기 마음을 먼저 꺼냈다.
“나 오늘… 좀 이상했어. 괜히.”
“뭐가.”
“도서관에서 책 반납받았는데, 그 사람 때문에… 아니, 그 책 때문에. 계속 걸려.”
“언니가 말했던… ‘백야’ 있잖아.”
“응.”
“그거… 사건 났다던 거. 그 뒤로 어떻게 됐어? 기사 같은 거라도 났어?”
“아니. 전혀.” 주영이 짧게 말했다. “언론도 조용하고. 근데 너 왜 그걸 물어.”


자영은 한 박자 늦게 말했다.
“오늘 반납된 책이 『백야행』이었어. 그냥… 제목이 겹치잖아. 그래서 내가 괜히 예민해졌나 싶기도 한데.”
자영은 말을 삼켰다가 덧붙였다.


“그리고 책 안에 이상한 게 있었어. 장난 같기도 한데… 내가 보기엔 좀, 이상해.”​
“『백야행』?”


주영의 목소리가 아주 조금 달라졌다. 놀람이라기보다, 단어를 한 번 더 씹어보는 듯한 멈춤이었다.
“응. 그리고… 책 안에 얇은 투명 필름 같은 게 떨어졌어.”
“필름?”
“응. 글자도 없고 그냥 투명한 조각인데… 누가 일부러 잘라 넣은 것 같았어. 모서리도 깔끔하고.”
잠깐 침묵이 흘렀다. 전화기 너머로 주영이 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 자영아.”
“응?”


주영은 『백야행』이라는 제목을 들었는데도, 그걸 사건과 바로 연결해 묻지 않았다. 오히려 한 박자 비껴서—자영 쪽으로 먼저 돌아왔다.


“너 오늘 하루 어땠어.”
“어?”
“컨디션. 괜찮아?”


자영은 그 질문이 이상하면서도, 이상하지 않았다. 주영은 늘 그랬다. 일이 커질수록 먼저 사람부터 붙잡았다.


“너 요즘 잠 잘 자? 밥은 먹고?”


그 질문이 툭 떨어지자 자영은 괜히 목이 마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 나 잠은 자.” 자영이 급하게 말했다. 그러고는 한 번 더, 자기 말에 근거를 붙이려는 듯 덧붙였다.


“언니, 나도 알아. 도서관에서 이런 거 흔할 수 있어. 근데… 내가 자꾸 그 ‘백야’ 사건이랑 겹쳐서 생각하게 돼. 『백야행』이 반납된 날이 하필 오늘이고, 책 안에서 그런 조각이 나오니까… 머리가 멈추질 않아.”


주영은 잠깐 조용히 듣다가, 힘을 빼듯 말했다.
“자영아, 그건 네가 예민해서가 아니라… 사람이 불안하면 연결을 만들거든.”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타박이 아니라 설명이었다.
“제목이 같다고 사건이 붙는 건 아니야. ‘백야’ 같은 단어는 흔하고, 책 안에 뭐 끼워진 건 더 흔해. 네가 느끼는 찜찜함은 이해하는데… 그걸 사실처럼 굳히면 너만 더 힘들어져.”
말은 그렇게 했지만, 주영은 끝을 짧게 끊지 못했다. 잠깐의 침묵이 이어졌다.


“그 필름… 진짜 아무 글자도 없었어?”
자영은 그 질문에서, 언니도 방금부터 ‘확인’ 쪽으로 기울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근데 언니.” 자영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나도 이게 뭐라고 확신하는 건 아니야. 그냥… 이상한 게 한두 개가 아니어서.”


주영은 한참 있다가, 피곤이 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자영아. 그런 거 그냥 분실물로 처리해. 네가 끌어안지 말고.”
타박이라기보다 보호에 가까운 말이었다. “너 거기까지 끌려들어 가면… 너만 힘들어져.”


그러고 나서 주영이 덧붙였다. 아주 낮게, 자영만 들으라는 것처럼.
“근데… 내일 출근하면 그 책 대여 기록, 화면 캡처 말고 날짜만이라도 적어둬. 그냥—혹시 몰라서.”​


자영은 잠깐 눈을 감았다. 방금 전까지 ‘상상’이라고 눌러두던 것들이, 주영의 마지막 한 마디 때문에 갑자기 현실 쪽으로 기울었다.


“언니… 나 진짜, 이게 뭐라고 확신하는 건 아니야.”
자영은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근데 만약에… 그 사건이랑, 그 사람이 빌려간 날짜가 겹치면. 그때는 나 혼자 ‘분실물’이라고 덮으면 안 되는 거잖아. 그래서… 날짜가 필요해.”​


자영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건… 정확히 언제였어?”


말을 내뱉고 나서야 자영은 자신이 그 질문을 얼마나 오래 참았는지 알았다. 날짜를 묻는 순간부터 이건 ‘느낌’이 아니라 ‘사실’이 된다.


주영 쪽에서 아주 짧은 침묵이 흘렀다. 마치 머릿속에서 기록을 한 번 꺼내 확인하는 시간처럼.


“…3월 22일 새벽.”


주영은 덧붙이지 않았다. 더 말하면 자영이 더 멀리 갈 걸 알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날짜만 남기고 숨을 골랐다.
자영의 손끝이 차가워졌다. 화면 속 대여 기록이 머릿속에서 겹쳐졌다.


3월 21일—그가 첫 대여를 한 날.
그리고 3월 23일 이후—이틀에서 사흘 간격으로

이어진 열 권.
가운데가 비어 있었다. 하필 그 비어 있는 날이, 주영이 말한 ‘3월 22일 새벽’이었다.
자영은 메모지 위에 날짜를 한 번 더 썼다. 3/21, 3/22, 3/23. 숫자가 가지런히 놓이는 순간, 꺼림칙함도 같이 가지런해졌다.​

3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