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연된 정의
언시생 시절 좋은 기자가 되라며 받은 사인북, 바로 <지연된 정의>. 영화 <재심>, 드라마 <날아라 개천용>의 원작이기도 하다. 사표를 던진 기자와 파산에 이른 변호사가 합심해 재심에 매달린다. 현생에 밀려 책장 속에 고이 잠들던 이 책을 서초동에 와서 처음으로 꺼내들었다. 재심 변호사로 유명한 박준영 변호사를 만난 것이다.
"변호사님, 재심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나요?
그냥 딱 보면 감이 오는 건가요?"
술자리가 정겨워질 무렵, 용기내서 물었다. 어떻게 의뢰인에 대한 확신을 얻을 수 있는지 궁금했다. 박 변호사는 소주잔을 내려놓고 자신있게 대답했다.
그건 금방 알 수 있어요.
오랜 시간 억울하다고 말하기는 생각보다 어렵거든요.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얘길 혼자 계속하는 건 외롭고 지치고 힘든 일이거든.
집에 돌아와서 다시 책을 펼쳤다.
사람이 사람에게 주는 '희망'
책 첫장에 큼지막하게 써준 글귀와는 반대로 책을 읽는 내내 희망은커녕 인류애가 박살났다. 불쑥불쑥 화가 치밀어올라 몇 번이고 끊어 읽었다.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사법 피해자의 인생은 누가 보상해주지? 법원의 판단이 틀렸다면 그건 누가 책임지지? 꼬리를 문 생각이 견디기 힘들었다.
책에선 현재진행형이던 '무기수' 김신혜 씨 사건이 전환점을 맞았다. 지난 6일 아버지를 살해한 혐의로 복역 중이던 김 씨가 25년만에 무죄로 풀려난 것이다. 자백과정이 석연치 않고, 자백을 뒷받침할 물적 증거도 없었지만, 최초 수사를 뒤집는 건 번번이 무리였다. 23살 여성이 47살이 될만큼 긴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녀는 교도소 담장 밖을 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끝이 아니다. 기한 마지막 날 검찰은 무죄 판결에 불복해 항소했다. 불구속 상태에서 재심은 다시 진행형이다. 책에 쓰여있듯, 부디 '용서를 빌러 오는 공권력을 기다리는 이들'에게 국가가 더 늦지 않길 바라지만, 결말은 모를 일이다. 김 씨와 박 변호사의 고군분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