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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이제 Aug 11. 2020

나의 젊은 엄마에게

다 커버린 딸이.

 


 함께 살고 있는 하우스메이트이자 집주인, Makki가 지난주 월요일부터 직장인으로서 사무실에 출근하기 시작했다. 코로나로 많은 이들이 직업을 잃는 시기에 그 어렵다는 취직을 해낸 것이다.


 4살, 7살 아이들을 살뜰하게 챙기며, 미국 유학생들을 위한 개인 에이전시를 운영해오던 그녀는 올초부터 코로나로 유학생 비율이 현저히 줄어들자, 매달 고정된 수익이 갈급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이직을 계획하며 퇴사한 남편 분은 10개월이 지나도록 무직 상태였다.


 결국 그녀는 소소하지만 성취감을 주던 자신만의 비즈니스를 잠시 접고, 가족을 위해 매달 고정 수익이 보장된 회사원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녀는 10년 만의 회사 생활을 앞두고 눈이 부시게 하이얀 블라우스를 샀다. 늘 검소한 차림이던 그녀는, 면접 때조차 마땅한 옷이 없어 내게 블라우스를 빌렸더랬다.


 첫 출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Makki를 맞으며 질문들이 목까지 찰랑찰랑 차올랐다. 그중 부담이 되지 않을 말들을 고르고 있는데, 그녀는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이 첫 출근에 대한 감상을 한 꺼풀씩 펼쳐 보였다. 회사가 생각보다 아주 넓더라는 이야기, 직원들이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카페가 있더라는 이야기, 마음이 잘 통하는 그녀의 상사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아이들과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줄어 내내 슬프더라는 이야기.

 

 반듯하게 균형을 이루는 이목구비와 각이 잡힌 비즈니스 웨어가 강직한 그녀를 더욱 총명하게 보이게 한다고 생각하던 중, 즐거운 이야기들 끝에 덧붙인 애달픈 속마음이 긴 말줄임표를 남겼다. 아이들과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줄어 내내 슬프더라는 이야기는, 그녀의 얼굴을 살피던 나의 시각 기관에서였던지, 아니면 미안한 기색의 목소리를 받아들인 청각 기관에서였던지, 분명 몸 어딘가의 감각 기관으로부터 한 장의 폴라로이드 사진과 같은 장면을 주륵 흘려보냈다. 그것은 엄지와 검지 사이에 끼고 팔락일 필요도 없이 빠르게 제 색을 찾아갔다.




 할머니, 언니와 저녁을 먹고 피아노를 동당거리다 노을이 지면 이끌리듯 바깥으로 나갔다. 그러면 역시나 엄마가 아파트 언덕 위를 또각또각 걸어 올라왔다. 그 모습은 마치 엄마가 노을을 통째로 업고 언덕을 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엄마는 그 누구보다 예뻤고, 늘 좋은 냄새가 났고, 똑똑하고, 못하는 게 없었다. 나는 언제나 주인공 같은 엄마를 자랑하고 싶었다. 친구들이 막 뛰어놀던 그 언덕에서, 엄마의 정수리가 보이기 시작할 때부터 목청껏 엄마를 불렀다.


 저녁 식사를 하는 엄마에게 학교에서 받은 <부모님 참관수업> 가정통신문을 보여주며 학교에서 이런 걸 한다고 이야길 시작했다. 별다른 말을 해줄 수 없는 엄마의 반응을 살핀 후, 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불참' 옆에 아주 능숙하게 엄마의 사인을 그려냈다. 엄마는 그런 나를 보고 그럴듯하다며 웃었더랬다. 그러나 이제는 알겠다. 엄마는 '애가 있어서', ‘엄마라서' 일에 소홀하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가 없어, 보통 사람 이상으로 회사에 열심을 바쳐야 했을 것이고, 안 그래도 비탈지게 기울어진 그 시대의 차별적 환경 속 차마 '딸아이의 참관수업'이라는 이유로 휴가를 낼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 년에 한 번, 엄마가 먼저 물어보던 학교 행사가 있었다. 어린이날을 전후로 하는 학교 운동회였다. 엄마는 6년 내내 운동회에 와 주었다. 내가 좋아하는 양념 치킨과 김밥, 오므라이스를 푸짐하게 싸들고서. 엄마와 할머니의 고정석은 노랑, 초록, 빨강 천막이 드리운 정문 옆 그늘막이었다. 달리기 계주들을 응원하다가도 눈을 돌리면 거기 그대로 있는 엄마와 할머니를 보며 안도감을 느끼곤 했었다. 다만 그 특별한 날 조차도 다른 엄마들은 이어달리기에 참가해서 전교생의 환호를 받는데, 왜 엄마는 한 번도 안 뛰어주냐고 토라졌던 기억이 난다. 어린아이의 악의 없이 모자란 공감력 때문인 것을 알지만. 그냥, 엄마가 와줘서 너무 좋다고 이야기했다면 어땠을까.




 하루 만에 더 애틋한 엄마가 된 Makki에게서, 젊었던 우리 엄마의 모습을 발견한다. 언제나 엄마와 직장인 사이에 걸친 채로 맘 편히 미안해하지도 못했을 엄마에게, 다 커버린 딸은 이제야 어린 날에 했으면 좋았을 말들을 적어본다.


 엄마의 퇴근을 기다리며 마음이 수채화처럼 예쁘게 물들곤 했었더라고. 일하고 돌아온 엄마의 모습은, 참관 수업에 오지 못한 것과 상관없이 언제나 히어로처럼 멋지고 아름다웠었더라고. 그러니 엄마는 내 곁에 더 자주 있어주지 못했던 것에 부디 마음을 쓰지 말고, 한 사람으로서 오롯이 커리어를 쌓아 올려도 괜찮다고. 그것은 죄스러워할 일이 아니라 언제나 존경받을 일이라고.


 엄마의 모든 노력과, 언제 오냐고 회사로 전화를 건 어린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음과, 6년 간의 운동회 참석과, 하트 케첩으로 장식한 오므라이스와, 토끼 모양의 과일 도시락과, 피곤을 감추던 웃음과, 퇴근 후의 발냄새에 전부 다. 감사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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