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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인우 Jun 15. 2022

네모가 너무 작았다.

나쁜 어른들이 너무 많다.

아이의 장례식도 치러주지 않아 아이의 친구들은 납골당에 와 서로를 붙들고 하염없이 울었다.

친구들이 붙잡지 않아, 떠난 것은 아닐 것인데도 아이의 친구들은 자책하며 울었다.


“언니, 네모가 너무 작아. 네모가 너무 작아서 꽃다발을 넣을 수 없어.”

아이의 친구는 그렇게 말하며 꽃다발을 들고 엉엉 울었다.

네모가 너무 작았다.

네모 속의 아이의 사진은 더 작았다.


장례식도 하지 않고, 서둘러 화장을 해버린 어른들 속에서 아이는 이제 쉬고 싶었을 것이다.

엄마 곁에, 할머니 곁에서 쉬고 싶다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아이의 친구들을 데려다주러 왔고 아이들이 슬퍼할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주었다.

손을 한 번 내밀어 주지 못한 것이 미안해 나도 섧게 울었다.

13년 전에 먼저 간 친구가 더욱 그리워져 또 울었다. 우리도 그때, 친구를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마음속에서는 한참 동안을 친구를 떠나보내지 못했던 것 같다.


우리가 조금 더 좋은 어른들이 되었으면 좋겠고, 또 개인이 그러할 뿐 아니라, 그런 구조를 만들어 아이들을 나쁜 어른들로부터 보호할 수 있기를, 학교가 조금 더 그런 역할을 해주길 바라며 10년간 학교에 있었는데 학교는 아직 그런 관심이 없는 것 같아 회의가 들던 때였다.


그저 아이가 천국에서 엄마와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만나 행복했으면 하고 기도했다.

너무 미안한 나날들이 힘겹게 지나가고 있었다.


나이가 한참 더 들고서는 그 나쁜 어른들이 꼭 나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자식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모르는 부모였기에 그럴 수도 있었겠다 싶다.

그러나 장례식이란 어쩌면 남은 자들을 위한 것이기에 꼭 해주었어야 하지 않았을까.

고인에 대한 마지막 예의는 아니었을까.


가끔씩 작은 네모를 떠올린다.

아이의 영혼은 참 좋고 넓은 곳에서 걱정 없이 뛰놀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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