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는 설탕이어라~

by 주인우

"할매, 뭐해??"

"국시할라고 그러지."

"왜 할매는 국수를 국시라고 해?"

"국시랑 국수랑 안 같냐~"


추운 겨울이었다. 할머니는 방에서 큰 나무 도마 위에다 밀가루 반죽을 홍두깨로 밀고 밀가루를 척척 뿌리고는 무쇠 칼로 서걱서걱 반죽을 썰었다. 아까 반죽할 때는 밀가루끼리 착착 붙었는데 밀가루를 뿌리니 안 붙는 것이 무척 신기하다.


"할매, 왜 국수를 안 사고 할매가 썰어서 만들어?"

할머니는 귀찮은지 내 말에 일일이 대답하지는 않았다. 나도 밀겠다고 우겨서 할머니는 나도 반죽을 밀어보게 해주셨는데 잘했다면서도 할머니가 다시 밀었다. 여섯 살 아이는 내가 민 반죽이 잘 못된 것 같다 조금 속상했다. 하지만 생전 처음 보는 음식 만드는 과정이 매우 신기하여 눈을 떼지 않았다. 할머니는 칼국수를 똑같은 두께로 썰었다. 한석봉 어머니랑 비슷한 칼 솜씨가 아닐까?


"할매, 할매도 불을 끄고 떡을 썰 수 있어?"

"어째 불을 끄고 썬대냐. 손 다칠라고."


추운 겨울, 아궁이에 불을 세게 땐 탓에 뜨끈한 방에서 밀가루 놀이를 하는 것은 재미있었다. 엄마가 해주는 국수처럼 멸치 육수에 고명이 올라간 국수나 설탕이랑 간장을 넣고 참기름을 똑 떨어뜨린 비빔국수를 기대했는데 할머니는 거무죽죽하거나 혹은 벌겋고 끈적해 보이는 몹시 수상한 국물을 가마솥에서 펄펄 끓였다. 나는 방에 앉아 쪽문으로 할머니가 가마솥의 팥을 아주 커다란 나무 주걱으로 휘휘 젓는 것을 보고 있었다. 왠지 저 붉은 국물에 빨려들어가는 것은 아닌가 조금 무섭기도 하고 주걱으로 젓는 것이 재미있을 것 같기도 했다. 그 국물은 아까 반죽하여 만든 두꺼운 면과 함께 커다란 사발에 담겼다. 몹시 뜨거운지 연기가 폴폴 나고 있었다.


커서 생각해 보니 그 날은 동지였던 것 같다. 새알심을 넣은 팥죽을 먹기도 하지만 아마 할머니는 그날 팥칼국수가 드시고 싶었던 게다. 혹은 조그마한 손주에게 팥칼국수 맛을 뵈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생긴 것이 몹시 요상했지만 할머니가 후후 불어주며 맛있다고 얼른 먹으라고 했다.


"할매, 이게 뭐랑가?"

"뭣은 뭐여, 팥칼국시재."

"맛없어. 뜨겁고, 맛없어!"


여섯살 아이에게 처음 먹은 팥칼국수는 너무 뜨거웠고, 팥의 고소한 맛이 맛있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동화책 속의 팥죽은 엄청 맛있다는데 할머니의 팥죽은 그렇게 맛있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할매는 설탕을 한 숟가락 푹 퍼서 내 국수에 넣어 섞어 주었다. 내가 어려서 넣어주는 것일까 생각했지만 할머니 칼국수에도 설탕이 한 숟가락 들어갔다.


"맛있어. 히~"


나는 씨익 웃으며 김치와 통통한 칼국수를 그제야 한 그릇 뚝딱 먹었다. 설탕을 넣어서만 맛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때까지 먹어본 팥은 단팥빵과 팥빙수, 떡에 든 단팥이었는데 단팥이 아닌 팥 맛은 오묘하게 맛있었다. 하지만 역시 설탕을 넣어 더 맛있었다. 지금도 식당에서 팥칼국수를 먹을 때는 설탕을 넣는다. 사람들이 왜 소금을 안 넣고 설탕을 넣느냐고 하면 씩 웃는다. "전라도는 설탕이어라~" 사실 이제는 설탕을 넣지 않은 팥칼국수도 맛이 있지만 할머니 생각이 나서 설탕을 넣어본다. 그래도 할머니가 끓여준 팥칼국수 맛은 어디에서도 나지 않는다.


팥칼국수에만 설탕을 넣는 것은 아니다. 농번기에는 너무 바쁘니까 뭐든 간단히 먹어야 한다. 조금 커서 여름 방학 때 내려가면 방학 내내 대체로 열무김치만 먹었다. 할머니는 언제나 바빴다. 고추밭, 깨밭, 양파밭, 고구마밭... 매야 할 밭이 항상 있으니 할머니는 겨울을 빼고는 항상 바빴다. 바쁜 봄과 여름의 새참 단골 메뉴는 국수였다. 할머니는 국수를 삶아 보리차를 부었다. 그리고 거기에 설탕을 또 한 숟가락 푹 퍼서 넣는다. '이게 뭐야?'라는 생각이 들지만 밭을 매다가 차가운 보리차를 부은 설탕 국수와 열무김치를 함께 먹으면 그만한 별미가 또 없다.


여름에는 맷돌을 돌려 콩을 간다. 할머니가 바쁘신지 내게 맷돌을 돌리라고 했지만 여섯살 꼬맹이의 힘으로는 여간해서 맷돌이 돌아가지 않는다. 그것도 못 한다고 할머니한테 혼나고는 할머니가 돌리는 맷돌을 바라본다. 콩과 물을 약간 넣어 맷돌을 돌리면 신기하게 콩국물을 주르륵 흐른다. 동화에서처럼 금은보화가 나오진 않았지만 콩국물이 나오는 게 무척 신기하다. 이번에는 시장에서 사 온 국수가 콩국물에 들어간다. 할머니는 거기에 오이를 얹어주었다. 왜? 여섯살 어린이들은 오이를 좋아하지 않는다. 오이를 골라내고 먹은 콩국수는 콩국물이 무척 고소했지만 어린 손주는 한 입 먹고는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할머니가 소금 쳐주랴?"하고 할머니의 햇볕에 그을린 손으로 굵은 소금을 넣어주었지만 별로 맛있지 않았다. 할머니가 이번에도 부엌에서 설탕을 한 사발 가져와서는 한 숟가락 푹 퍼서 내 그릇에 넣어주었다.


'음~ 이 맛이지!'


전라도의 국수에는 설탕이 들어간다. 아니, 손녀에게 뭐든 한 입 더 먹이고 싶었던 할머니의 국수에는 항상 설탕이 들어갔다. 그래서 여름이 되어 콩국수를 먹을 때에도, 겨울에 뜨끈한 팥칼국수를 먹을 때에도 항상 설탕을 한 숟가락 넣어본다. 이제는 설탕을 넣지 않은 국수가 더 맛있는 것 같지만 그래도 설탕을 넣어본다.


다시는 할머니의 국수를 먹을 수 없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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