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중국 요리를 먹은 가게 이름은 장안각이었다. 예전에는 지금처럼 중국집이 그렇게 많지 않았고, 장안각은 동네에서 제법 큰 가게였다. 다른 중국집들이 그러하듯이 빨간색 바탕에 장안각이라는 글씨가 노란색 글씨로 된 아주 큰 간판이 걸려 있었다.
우리 동네 배달 음식은 역시 장안각의 점유율이 압도적이었던 것 같다. 가게에 가서 먹어야 더 맛있는 것 같았지만 역시 짜장면은 배달로 먹어야 제맛! 장안각은 장안동의 모든 집에 아주 빠르게 짜장면과 짬뽕을 가져다주었다. 어떻게 그렇게 집을 잘 찾는지 몹시 신기했다. 지금처럼 내비게이션이 없던 시절이었는데 배달하는 아저씨들은 기가 막히게 집을 찾았다.
장안각은 짜장면 위에 메추리알과 오이를 채 썰어서 올려주었다. 요즘 짜장면에는 두 가지가 모두 없는데 나는 이 짜장면이 지금도 그립다. 메추리알은 나름의 영양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센스였을 것 같은데 그 시절 짜장면에는 대체로 메추리알이 있었던 것 같다. 초록의 오이는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담당하기도 하였으나 자칫 느끼한 짜장면을 조금 상큼하게 해주는 매력도 있었다.
짜장면을 처음 본 순간, 눈살이 찌푸려졌다. 이 까맣고 건더기가 뭉글뭉글 있는 음식은 무엇일까? 어른들이 맛있다고 하는데 검은색 음식에 대한 두려운 마음에 엄마 등 뒤로 가 숨고 빼꼼 고개만 내밀었다. 맛있게 먹는 어른들을 보며 엄마가 내민 한 젓가락에 입을 벌려 받아먹었다. 오물오물 한 입 먹고는 자리에 앉아 엄마의 짜장면 반을 덜어 먹은 것 같다.
그것은 신세계였다. 그런 감칠맛과 달콤함의 조화라니! 게다가 노오란 단무지를 얹어 먹으니 이것은 그야말로 환상적인 맛이었다. 매일 짜장면을 먹자고 졸랐지만 짜장면은 특별한 날에나 먹을 수 있었다. 제일 특별한 날은 역시 이삿날이었다. 가스가 들어오지 않아 밥을 하기가 어려우니 짜장면을 먹으려고 이삿날을 기다리기도 했던 것 같다.
우리는 옥탑방에 살았다. 여름이면 선풍기를 아무리 틀어도 더웠고, 겨울엔 몹시 추웠다. 그래도 옥상에는 마당처럼 약간의 공간이 있어서 화분에 딸기나 감자 같은 것을 심고, 열매가 나오기를 바라며 식물이 자라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었다. 아침에는 훌라후프와 체조를 할 수도 있었다. 건너편 건물에는 학생회장 오빠가 살았는데 학교에서 어마어마하게 멋있었던 6학년 오빠는 매일 아침마다 못 일어나서 어머니의 잔소리를 듣는 것 같았다. 훌라후프를 하면서 '6학년의 삶이란 고단한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부모님은 해물탕 가게를 열었다. 두 분 모두 너무 바빴다. 저녁은 식당에 가서 먹으면 되었는데 아침을 차리고, 엄마가 해놓은 도시락 반찬을 통에 담아 도시락 두 개를 싸는 것은 내 몫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꼭 도시락 통을 먼저 씻어놓아야 했다. 안 그러면 놀다가 깜빡하기 때문이었다.
주말에는 뭔가 특식이 먹고 싶었다. 부모님은 식당에 와서 밥을 먹으라고 했지만 식당에 가면 온통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우리는 최대한 늦게 식당으로 갔다. 부모님은 혹시 몰라서 비상금을 조금씩 주셨는데 우리는 그 돈을 조금씩 모아 일요일에 장안각 짜장면을 시켜먹곤 했다.
누가 들어도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어린아이의 목소리였을 것이다. "배달이요~"하는 목소리를 듣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총알 같이 튀어나온 아이는 밝게 웃으며 천 원짜리를 내밀었다. 아이는 둘인데 우리는 언제나 짜장면을 한 그릇만 시켰다. 그리고 한 그릇을 나눠 먹고는 밥을 넣어 비벼 먹었다. 짜장면을 두 그릇 시킬 돈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부모님은 혹시 몰라 비상금을 약간 넉넉히 주셨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짜장면을 먹고 남은 양념에 밥을 비벼서 김치를 얹어 먹는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 항상 한 그릇을 시켰다.
어느 날부터였을까. 짜장면이 항상 1.5배의 양이 온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언제나 배가 고팠기 때문에 눈치채지 못했는데 눈치 빠른 동생이 알아차렸다. 처음에 왔던 한 그릇보다 훨씬 많은 양이 왔다. 처음엔 실수로 곱빼기를 주었나 보다며 신나게 먹었는데 그 이후로는 언제나 짜장면 곱빼기가 왔다. 장안각이 양을 늘렸나 보다고 생각하면서 우리는 더욱 신나게 짜장면을 먹었다. 우리는 계속 짜장면을 한 그릇만 시켰다.
6학년 때 이사를 했다. 신내동의 빌라로. 옥탑방에서 30평대의 빌라로 이사를 하였으니 여러 모로 신내동 집이 더 좋았지만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장안각 짜장면을 더 이상 먹을 수 없다는 것은 무척 안타까운 일이었다. 신내동에도 중국집이 있겠지만 그 중국집에도 장안각 같은 따뜻한 마음이 있을까 싶었다.
6학년 때 학급문고에서 '우동 한 그릇'이라는 책을 읽었다. 돈이 모자라서 아이들만 먹이려고 우동 한 그릇을 시킨 손님에게 두 그릇을 주면 마음이 상할까 싶어 우동 1.5그릇을 주었다는 마음이 뭉클해지는 그 글을 읽으면서 장안각을 떠올렸다.
장안각 사장님은 옥탑방에 사는 어린이들이 매주 일요일 점심때 짜장면을 꼭 한 그릇만 시키는 것이 조금 안타까웠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꼭 곱빼기로 주셨던 것은 아닐까?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언제나 실수로 오는 짜장면 곱빼기가 사장님이 바빠서일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책을 읽고 나서야 비로소 그것이 어린이들이 배불리 먹기를 바라는 어떤 어른의 작은 배려였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실은 그때는 감사하긴 하였지만 눈물이 나게 감동적인 것은 아니었다. 나이가 한참 들고, 10년 넘게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면서 아이들을 부모만 키우는 것이 아니란 것을 절실히 깨달으며, 학교와 마을 어른들의 따뜻한 배려 속에서 아이들이 자라야 함을 배워가면서 지금은 가끔 장안각이 생각나면 코끝이 찡해온다.
장안각은 없어졌다. 10년이 넘은 시간이 지나고 우리는 이 동네로 다시 이사를 오게 되었다. 그리고 제일 먼저 장안각을 찾아갔다. 장안각이 없어지고 그 자리엔 다른 식당이 들어와 있었다. 혹시 자리를 이전했나 싶어 여러 가지로 검색해 보았지만 장안각은 없었다.
장안각 사장님이 아주 잘 사실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마음이 따듯한 사람들은 주변에도 선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대부분 잘 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우연한 기회로 장안각 사장님을 한 번 뵙게 되면 꼭 따듯한 밥 한 끼를 사드리고 싶다.
참 고마웠다고.
그렇게 따듯한 마을 어른들의 사랑을 받고 저와 동생은 예쁘게 잘 자랐다는 말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