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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nice Mar 17. 2021

맑은 물방울 안에도 흑색이 있다

"한국현대미술거장전-더오리지널" 후기 (조선일보미술관)



Dilute or compose,

옛 친구들이 비웃을 지도 모르지만(?) 어릴 적 나는 꽤나 모범생 강박증을 갖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뜻하지 않았던 실수를 한 순간, 나는 세상이 무너진 것 마냥 이제 내 인생은 돌이킬 수 없이 탁해졌다고 생각했다. 영어 모의고사에서 '맑은 물에 빨간 잉크를 섞은 뒤 다시 맑아지게 하려면 얼마나 더 많은 물이 들어가는가' 뭐 이런 지문을 보면서 혼자 벙쪄있었으니까. Dilute(희석하다)라는 단어를 처음 알았던 지문인 것도 잊을 수 없다.


그게 어린 날 순진한 유리멘탈에서 비롯했던 생각인 건 이미 깨달았지만, 어제 김창열 화백의 그림을 보면서 그 때 기억이 떠올라 기분이 이상했다. 멀리서는 너무나 맑고 투명해보이는 물방울이고, 그 이유로 워낙 유명한 작품들이지만 가까이서 감상하긴 처음이었으니까. 영롱하게 맺힌 물방울을 표현하는 데엔 탁한 황갈색과 회갈색과 검정색도 사용된다. 당연하다, 음영이 있어야 물방울이 돋보이니까. 누구도 그를 보고 탁한 물방울이라 여기지 않는다. 맑음을 표현하기 위해선 맑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걸 생각하게 해서 그림 앞에 오래 서 있었다.


김창열의 '물방울'



박래현 작가의 작품을 많이 본 것도 좋았다. '자유B'와, 여러 점의 정교한 동판화들이 놀라웠다. 작년에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했던 <박래현, 삼중통역자> 전을 보지 못한 것이 너무 아쉬워질 정도.


'자유B'

박래현의 동판화


수화 김환기의 드로잉 작품들과, 산의 기백을 담아낸 유영국의 그림들은 역시 좋았다. 이우환의 '선으로부터'는 고매한 정신이 느껴져 경이로웠다. 지난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 하이라이트전에서 느낀 감정들이 이어지는 기분.


김환기의 드로잉


이우환


유영국


 전시 이름답게 좋은 것 투성이 알짜배기 전시회라 다녀오자마자 친구들한테 추천했다. 무료전시이고, 작품 설명 리플렛은 1000원. 21일 이번 주 일요일까지, 조선일보 미술관에서.




#한국현대미술거장전 #더오리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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