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보기 전에 먼저 읽는 책
구병모 님의 파과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건 이동진 님의 빨간 책방에서였다. 이후 구병모 님이 쓰신 책들의 리스트를 쭉 찾아봤는데, 위저드 베이커리 등 소재가 참 독특하고 참신해 보였다.
작가님의 책을 번역해 볼까? 제안서를 보내려고 몇 번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위저드 베이커리는 이미 번역되어 있었던 것 같은데, 작가님이 에이전시 관리를 받는 분인 걸 알게 되고 제안서 보내는 걸 포기했던 것 같다. 스타 번역가들이 수두룩(?)할 텐데 번역상 공모전에 입상한 적도 없고, 출판 번역가도 아닌 나를 누가 믿고 번역을 맡기겠는가?
장애물 앞에서 포기가 너무 빠르다. 번역 콘테스트에서 상을 탈 자신도 없고 시간도 촉박해서 그런지 돈도 못받는 번역에 공을 들이는 마음을 가지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내 포트폴리오 쌓는 마음으로 해봐야겠지?
예전 직장 팀장님께선 구병모 작가님과 같은 대학을 다니셨더랬다. 글을 잘 쓰는 선배로 기억하신다고. 팀장님도 글 잘 쓰시고 그분이 쓰신 소설도 읽어볼 수 있다면 참 좋겠는데, 그놈의 생계가 몬지.
중요하지 생계...
파과를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다가, 뮤지컬 파과 공연에 대한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심지어 내 최애 배우 김재욱 님이 등장한다는 소식까지!
이젠 안 읽을 수 없다.
나이가 들어 집중력이 떨어져서인지, 엉덩이 붙이고 앉아 꼬물꼬물 책장을 넘기며 그 안에 파묻히는 일이 예전보다 쉽지 않다. 필라테스 레슨 끝나고, 버스 시간 기다리며 카페에 앉아 몇 장, 집에 앉아 몇 장, 그리고 지하철에서 그렇게 천천히 책을 읽었다.
첫 페이지부터 들었던 생각은, '이분은 어쩜 이렇게 글을 쓰지?'였다.
언젠가부터 문장을 짧게 써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힌 것 같다. NGO에서 캠페인 이메일을 쓰면서, 대학원에서 쓰는 논문체 따위 이제 개나 줘버려라는 태도로, 글을 짧게 쉽게 쓰는 방법에 익숙해졌다.
6학년 초등학생도 이해할 수 있도록 글을 쓰라는 말을 귀가 따갑도록 들었다.
물론 그 말에 공감하는 바가 많다. 나쁜 의도를 숨기기 위해, 읽는 사람을 헷갈리게 하는 게 목적인 글도 있다고 본다. 그런 못된 글을 죄악시하는 태도에 너무 익숙해지다 보니, 나는 어느새 이해하기 어려운 글을 혐오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길고 어려운 글이 무조건 나쁜 글이 아닐 텐데 말이다.
잠시 멈춰 생각하도록 만드는 글들이 있다.
"Difficult is good."
미국의 시리 허스트베트(Siri Hustvedt) 작가가 이 말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녀는 SNS에 남발되는 짧고, 한눈에 이해가 되지 않는 글들을 너무 쉽게 취소하는 문화(Cancel culture)에 대한 반감을 이렇게 표현했던 것 같다.
그녀가 여기서 말하는 Difficult는 일부러 어렵게 쓰려는 나쁜 의도를 숨기고 독자를 속이려고 하는 못된 글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허스트베트는 복잡한 아이디어를 무조건 쉽게 풀어서 심지어 갓난아이도 이해하는 글을 쓰라고 강요하는 듯한 광기 어린 집착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일단 파과를 읽으면서 느낀 점은 구병모 님의 문장이 정말 길다는 것이었다. 당연히 긴 문장이다 보니 호흡이 길 수밖에 없는데, 그 안에서 긴박함을 잃지 않으면서도 흐름이 살아 있다.
집중을 하며 읽어야 하는 글이지만, 많은 노력을 하지 않아도 묘하게 집중이 된다. 나를 사로잡는다.
팟캐스트를 첨 들었을 때, 처음 이 소설을 쓰게 된 계기에 대해 말씀해 주셨다. 냉장고 속의 썩어가는 사과를 보고 이야기를 구상하셨다고 한다. 어떻게 그 이미지가 이런 글로 탄생할 수 있는지...
이 소설의 영어 제목은, "The Old Woman with the Knife, "로 주인공 캐릭터를 좀 더 직접적으로 묘사하는 방식으로 제목을 바꾸었다. 현명한 판단인 것 같다. "파과"와 "The Old Woman with the Knife"라는 제목은 물론 뜻 자체는 다르지만, 전체적인 의미와 사운드 적인 측면에서, 서로 일맥상통하는 것 같다.
이 긴 문장들이 번역가 Kim Chi-young님의 손에 어떻게 영어로 다시 태어났을지 정말 궁금하다.
뮤지컬 공연 날도 점점 다가오는데, 책을 그전에 다 읽게 돼서 다행이다.
이미지 크레딧 Manfred Ritcher,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