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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니아 Oct 06. 2022

주제 없는 일상

하루 종일 글을 읽고 쓰다 보니 집에 오면 활자를 쳐다보기 싫다. 드라마는 영상을 다루는 일이라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글, 계속 글이다. 그럼에도 하루 동안 사람들과 부딪히고 사건을 만나고 무언가를 생산해내는 과정 중에 배우고 익히는 것이 많아 기록하지 않을 수가 없다. 침대 맡에 놓인 일기장에 한 줄 쓰고 고꾸라지듯 잠든다. 피곤한 하루가 반갑다.


오랜만에 주제 없는 글을 쓰러 브런치에 들렀다. 주제가 예리하고 단숨에 읽혀야 하는 글을 써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데, 내 사적 공간에서만큼은 그런 한계를 두고 싶지 않다. 이리저리 손이 가는 대로 휘적이는 글을 쓰고 싶다.


1. 정읍

며칠 전 정읍에 다녀왔다. 친구네 집 냉장고에 나와 친구가 찍은 사진이 붙어있었다. 친구 어머니가 프린트해서 붙여두신 사진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귀빈 대접을 받는다. 친구가 잠시 자리를 비우고 나 혼자 친구의 가족들과 있는 순간에도 어색함이 없었다. 두런두런 이야기가 끊이질 않고 웃음이 계속되는 공간. 친구는 우리 집에서 우리 엄마 아빠랑 잘 놀고, 나는 친구 집에서 친구네 엄마 아빠랑 잘 논다. 멀리 떨어져 있지만 가족이 된다는 게 이런 걸까 싶다. 그곳에서 새롭게 만난 사람에게도 환대받았다. 그들과는 뿌리를 섞고 싶다.


2. 애벌레 (사과에서 나온 거 아님)

친구 어머니가 주신 미니사과를 들고 왔다. 도착하자마자 허기가 져서 달콤한 사과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우물 우물대며 의자에 앉았는데 내 눈앞에 반갑지 않은 생물 하나가 포착됐다. 검색해보니 쌀 애벌레라고. 한 마리를 죽였는데 다음 날 또 한 마리가 나왔고 오늘 또 한 마리를 죽이고 출근했다. 지난 집에 바퀴가 자주 출몰해서 이사를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는데 이번에도 벌레라니 망연자실이었다. 일단 엄마의 조언대로 여기저기 소독약을 뿌리고 쌀을 싹 버렸다. 나는 애벌레와 거주공간을 공유하고 싶지 않다. 집을 관리하는 건 역시 힘들다. 나는 정말 살림에 소질이 없다.


3. 스터디

어제는 장르 스터디를 했다. 내가 맡은 장르는 로맨틱 코미디. 2000년대부터 올해까지 로맨틱 코미디 장르를 모두 리스트업 해서 리포트를 작성했다. 한 달 동안 틈틈이 작업했지만 결과물을 보니 실망스러웠다. 죽상을 하고 회의실에 들어갔는데 사람들이 나의 페이퍼를 재밌게 읽었다고 피드백했다. 늘 이런 식이다. 잘 썼다고 생각하면 사람들의 반응이 안 좋고, 망했다고 생각하면 사람들이 좋게 말한다. 더 이상 나의 감을 믿을 수 없다. 자신감이 오히려 하락한다. 그동안 로코 짬바가 꽤 있어서인지 내용은 괜찮았나보다. 친구들에게 이상형월드컵을 하고다닌 보람이 있다. 회의가 길어져서 약속에 많이 늦었다. 그 와중에 김밥이 먹고 싶어서 김가네에서 산 멸추 김밥을 입에 욱여넣고 또 재밌게 놀았다.


4. 결혼식

요즘 결혼식에 대해 하루에 한 번씩 생각한다. 주변에서 결혼을 많이 해서인지 이상하게 누구와 이야기하든 대화 주제가 결혼으로 귀결된다. 어떤 사람의 결혼식은 여타의 다른 결혼식과 다를 바가 없고 식순도 똑같지만 엄청나게 감동적이고, 어떤 사람의 결혼식은 자신만의 특별함으로 중무장을 했지만 지루하다. 결혼식이 문제가 아니라 결혼하는 사람에 대한 나의 감정이 특별하지 않은 것이 이유라는 걸 깨달았다. 그걸 깨달은 뒤부터는 초대받았다고해서 다 가지는 않는다. 특별한 관계가 아닐 때 가는 결혼식은 아직 내게 어렵고 불편하다. 인성 파탄자인 것 같아 큰 고민에 빠졌었는데. 어쩔 수 없었다. 애석하게도 이런 내가 나라는 사실... "그러다가 나중에 너 결혼할 때 수금 제대로 안 될걸?"이라는 말을 어디에선가 들은 적이 있는데, 나는 아직 결혼을 할 거라는 생각을 안 해서 그런가. 잘 안 와닿는다. 이러다 나중에 땅을 치고 후회할 수도. 그럼 그냥 식을 안 올리면 되는 게 아닐까?


5. 10월 22일

생일에 ㅅㅁㅅ 친구들이 콘서트 티켓을 선물해줬다. 나는 지금 그날만을 고대하고 있다. 스탠딩인데 스쿼트 열심히 했기 때문에 잘 버틸 수 있을 것 같다. 덕심은 자그마한 불씨에도 화르르 타오르는 것. 그를 눈앞에서 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 힘이 불끈 솟는 기분이다. 누군가를 생각하고 힘이 난다는 건 정말 로맨틱한 일 같다. 불끈 까지는 아니고 스리슬쩍 힘이 나는 사람이 한 명 있었는데. 그도 나를 그렇게 생각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음을 더 키우지는 않았다. 나는 내 마음을 조절하는 방법터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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