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가 변했다. 아빠가 젊은 부목사였던 시절, ‘사모’라 불리는 목사의 아내는 직업을 가져서는 안 됐다. 이제는 오래된 시골 교회에서도 직업 있는 사모를 선호한다. 교인으로서는 교회의 변화가 반갑다. 하지만 목사의 아내로 살기 위해 많은 것들을 포기한 한 중년 여성의 딸로서는 이런 변화가… 너무 밉다.
20여 년간 내가 지켜봐 온 바에 따르면, 사모라는 이름은 직업보다 훨씬 무거웠다. 아빠도 그랬지만 엄마는 자신의 삶과 교역자의 아내로서의 역할을 구분하지 않았다. (현재의 나는 구분할 필요가 있음에 공감하지만, 뭐 어쨌든 우리 엄마는 안 그랬다는 것.) 365일 24시간을 회사에서 대리나 과장 같은 이름으로 사는 격이었다.
다른 사모들의 삶은 전혀 모르기에 왈가왈부할 순 없고, 적어도 우리 엄마는 기꺼이 그 삶을 받아들였고 순종했다. 엄마를 여전히 너무 좋아하는 아빠는 엄마를 끔찍이 챙겼고, 엄마는 아빠가 목회를 잘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기쁘다고 했다. 그러나 사랑만으로 이겨내기에 젊은 목사와 사모가 겪어야 하는 복잡한 교회 일은 너무 많았다.
시간이 흘러 내가 대학에 갈 즈음, 다양한 매체를 통해 그간 숨겨져 있던 사모들의 사연들이 조금씩 드러났다. 목사의 노고에 비해 알려지지 못했던 사모들의 이야기가 터져 나오자 교회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 변화를 증명하듯, 교회는 사모들에게 직업을 가져도 된다고 했다. 사모가 아닌 개인으로서의 삶을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라고도 했다. 나도 엄마에게 지금이라도 무언가 배워 일을 시작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엄마는 ‘그런가…’ 하며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부터 찾아가 보겠다고 말했다.
엄마 주변에 직업을 갖는 사모들이 점점 늘어났다. 엄마도 대학생활을 다시 시작했다. 20년째 경력단절이던 엄마가 실습을 나가 일도 했다. 오십이 넘어 도전을 시작한 엄마를 모두 칭찬했고 자랑스럽게 여겼다. 또래 사모님들도 이제 '사모님의 인생을 찾을 때가 되었다'며 엄마를 격려했다.
그러나 우리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 말이 엄마에게는 지금까지의 인생을 부정하는 말로 들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어느날 엄마는 '그동안의 내 삶은.. 내 삶이 아니었던걸까?' 하고 물어왔다.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그런 관점에서 엄마의 삶을 생각해본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사모를 직업으로 보지 않는 교회 안팎의 다양한 시선들은 엄마의 삶을 묘하게 비껴가고 있었다. 엄마는 지금껏 사모를 직업으로 생각하고 살아왔는데, 이제와서 직업을 찾으라는 그 말이 속상했다고 한다. 머리를 한 대 맞은 거 같았다.
사실 엄마는 이미 20년 전부터, 엄마가 택한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내고 있었다. 그건 단순히 경제활동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대한 문제가 아니었다. 나의 엄마는 아빠와 결혼하며 직업으로 사모를 택했다. 엄마는 지금껏 한 번도 자신의 삶이 타인을 위한 삶이라 여기지 않았다. (물론 나에게는 희생하는 엄마의 모습이 각인되어 있지만, 엄마는 엄마 자신의 삶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엄마의 삶 앞에 나의 페미니즘이 얼마나 납작한지 느낀다. 엄마의 삶은 언제나 늘 주체적이었는데 나는 27년간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엄마가 더 자유롭게 살기를 바라기만 했다. 주체적인 삶을 강요하는 순간 그것은 더이상 주체적이지 않은 것이 되고, 이미 스스로 주체적으로 살고 있던 이에게는 그런 말조차 하나의 잣대가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모든 사모들이 모든 엄마들이 자신의 삶을 선택할 수 있기를. 그리고 그 형태가 무엇이든 모든 삶이 옳았음을 긍정하는 사람들이 곁에 있기를 바라본다. 그리고 어떤 선택을 하든 우리 엄마의 삶은 언제나 정답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