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제니아 Aug 24. 2022

자연스러운 사랑

대학부 때 교회에서 선물 받아 읽지도 않고 책장에 꽂아두었던 <스크루테이프의 편지>가 눈에 들어온 건 찰나의 순간이었다. 자려고 누웠다가 책 제목이 눈에 띄어 스탠드를 켰다. 그리곤 갑자기 책에 밑줄을 그어가며 열독을 시작했다. 목사님이며 교수님이며 그렇게 추천했지만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책. 왜 이제 읽었나 싶을 만큼 어이없게도.. 한 문장 한 문장이 가슴에 와닿았다. 마음을 연다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지만 또 의외로 쉽게 될 때도 있다. 6년간 이삿짐으로 이고 지고, 기어이 서울까지 끌고 왔지만, 한 번을 열어보지 않던 저 책을 지금 읽게 된 것처럼 말이다.

지난 주말에 일곱 살 어린 동생이 집에 놀러 왔었다. 씻지도 않고 침대에 철퍼덕 누워 하루 온종일 유튜브만 보는 동생을 보니 잔소리력이 풀로 차올랐다. 하지만 삼켰다. 저 친구의 마음 문이 열릴 만한 타이밍이라는 게 있을 테니까. 그 전엔 그냥 잔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을 테니 말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난 꽤나 멋진 누나인 것 같은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하나님은 여러 모습으로 내 마음 문을 두드리신다. 2주간 다양한 에피소드들이 있었다. 누군가에게 말한다면, ‘그게 왜?’ 할 만큼 진부하고 그리 감동적이지도 않은 순간들. 그러나 하나님은 내가 기도한 대로 나의 맥락에 맞게 여러 상황을 선사하셨다. 그래서 “아, 하나님 진짜 너무 날 잘 알아셔”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은 언제나 마음을 주고 계시며 내가 문 열기만을 기다리신다는 걸 또다시 느낀다.

나에게는 마음을 더 줘서 상처받고, 마음을 덜 줘서 미안해하며 이어지는 관계들이 더러 있다. 근데 진짜 사랑하면, 못 받아서 섭섭하지도 않고 너무 많이 줘서 아깝지도 않은 거 같다. 내가 동생에게 느끼는 감정처럼 말이다. 열릴 때까지 기다리는 그 시간이 전혀 아깝지 않은 것, 그게 바로 사랑 아닐까. 스크루테이프의 편지가 나를 6년동안 기다려주었던 것처럼 말이다.

저저번 주 설교 내용을 나에게 적용해본다. 사랑해야지! 해서 사랑하는 게 아니라 자연스러운 사랑을 구해보려 한다. 누군가가 마음 문을 여는 그 타이밍에 들어갈 수 있다면 은혜라고 말할 수 있도록. 당신을 위해 참고 기다리는 게 전혀 아깝지 않기를.

“환자가 원수의 사랑을 구하려거든, 실제로 사랑을 구하는 대신 사랑의 감정을 저 혼자 꾸며내려고 애를 쓰게 하는 한편, 제가 이런 짓을 하고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하게 하란 말이지” -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중에서

작가의 이전글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오백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