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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니아 Jul 29. 2022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오백

받지도 않아놓고 받아놓은 것처럼 굴었다. 맥없이 날아간 나의 500만 원. 정확히 말하면 '나의' 500만 원도 아니고, '날아간' 500만 원도 아니다. 받은 적도 없기 때문에 쓴 적도 없는, 상상 속의 500만 원이었다. 난 그 돈을 받게 될 거라고 확신했을 때부터 부모님이 서울에 오실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한 번도 못 먹어본 음식, 한 번도 못 받아본 서비스를 그 돈으로 대접해드리리라. 잠이 오지 않는 날마다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서 코스 음식을 먹으며 내가 준비한 선물을 풀어보는 엄마 아빠의 표정과 대사를 상상씩이나 하면서 기분 좋은 잠에 빠졌다. 그 달콤한 상상이 한순간에 날아가버렸으니, 실망이 밀려올 뿐만 아니라, 마음대로 마음을 키운 미련한 내가 막 미워지기까지 한다.


사실 그 500만 원에는 상징적 의미가 있었다. 취직하면 첫 월급의 전부를 부모님께 드리고 싶었다. 첫 월급..이라는 쥐꼬리만 한 무언가를 받은 적은 있었지만 실천하지 못했다. 서울에 처음 떨어져 잔인한 금액의 월세를 내는 중이었고, 생활비도 필요했으니. 그렇게 로맨틱한 순간은 내게 찾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나의 커리어에 기념할 만한 무언가가 생기면 삐까뻔쩍하게 부모님을 대접하리라, 그렇게 생각했다. 이번 500만 원이 그 순간이 될 줄로 알았으나, 그건 나의 망상이었다는 것. 처참히 부서졌다.


자라면서 첫째의 무게를 느낀 적은 없으나 다 자라니 그게 첫째의 무게였구나- 하고 인정하는 순간이 종종 찾아온다. 부모님께 돈을 드릴 정도는 아니지 않냐, 더 공부를 해봐라, 하고 말하는 교수의 말에 울화가 치밀었고, 엄마의 돈타령이 지긋지긋했고, 자연히 아끼고 덜 사는 나에게 오만 원짜리를 턱턱 내어주는 아빠를 생각할 때면 열이면 열 코가 찡했다. 철없이 소고기 사달라고 입이 튀어나온 동생 놈을 보면 이게 첫째의 무게인가도 싶다.


돈이 넉넉히 있어본 적 없으니 돈을 사랑한 적 없고, 되려 돈을 미워했지만, 목사라는 이름 안에 평생을 비정규직, 것도 노동자도 아닌, 교회가 나가라면 짐 싸들고 곧 나가야 하는 사람을 가장으로 둔 첫째 딸은 어떻게 하면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을까를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돈보다는 사랑, 이성보다는 감성, 현실보다는 이상을 따라 평생을 살아온 엄마와 아빠 사이에서 태어난 나라는 사람은 생각보다 그렇게까지 실천적인 위인이 못됐다. 그런 부모는 자식에게 명문대를 가라, 대기업을 가라, 돈을 많이 벌어라 한 마디 한 적 없었으니. 그런 사람들 밑에서 내가 어떤 (높아보이는) 꿈을 꿀 수 있었을까.


그래서 찾아온 행운 같은 500만 원, 엄마 아빠가 가르쳐준 대로 살아서 무언가를 이루고 있어요-를 보여줄 수 있는 그 행위를 원했나 보다. 떼돈은 못 벌어도 제 앞가림은 해요. 제 힘으로 큰돈을 받았어요. 그러니 이제 제 걱정은 마세요. 할 수 있는 일종의 의식 같은 것.


하지만 그건 내가 맘대로 만들어버린 불행이다. 말하자면 상대적 빈곤함같은 것. 실제로는 빈곤하지 않지만 나의 이상에 비해서는 빈곤한.. 즉 괜한 피로도를 높이는 상황일 뿐이다. 이미 떠나간 달콤한 상상, 그냥 함께 있는 시간만으로도 만족스러운 우리의 휴가, 괜한 욕심과 상상으로 망쳐버리지 말고 그냥 이 순간을 즐기기로 다짐하는 중이다. 구태어 무언가를 더 하려고 하지 않기. 근데 맛있는 레스토랑 예약하면.. 좋기는 좋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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