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지런히 읽고 써야 할 이유
경향신문 북섹션에서 이 책을 처음 만났다. 책 소개를 읽자마자 나는 인터넷으로 책을 주문했다. 책은 무조건 서점에서 사야 한다는 나만의 룰을 깼다. 지금 당장 이 책을 보고 싶다는 강렬함에 이미 사로잡혔는데, 서점에 갈 수 있는 주말까지 기다릴 수는 없었다. 이 책을 보자마자 나는 무조건 '구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이걸 빌려서 보거나 중고로 볼 수 있는 책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김지은 씨의 목소리가 책으로 나오다니. 감격이었다. 나는 그간 김지은 씨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 가끔 드문드문 나오는 기사는 모두 안희정 판결과 관련한 이야기들이었다. 그가 직접 그의 이야기를 글로 써내는 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을까. 얼마나 고심했을까. 만감이 교차했다.
<김지은입니다>를 첫 번째 서평으로 쓰기까지 약간의 고민의 시간을 거쳤다. 이 책은 분명 최근 읽은 책들 중 나를 완벽하게 사로잡은 책이다. 그럼에도 망설임이 있었다. 감히 감상을 덧댈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김지은 씨는 책을 읽는 내내 나를 어떤 소용돌이 속에 밀어 넣었다. 이 책과 함께한 날동안 짧은 탄식이 입 밖으로 나오기도 했고 눈물이 나기도 했다. 답답함에 깊은 한숨을 쉬기도 했고 주체할 수 없는 화가 나기도 했다. 마지막 장까지 다 읽고 나서야 나는 무언가 써보기로 결심했다. 쓰지 않을 이유보다 쓸 이유가 더 많았다.
2018년 3월 5일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수행비서 김지은 씨는 JTBC 뉴스룸 생방송에 출연해 성폭행 피해사실을 말했다. 이 책은 그날로부터 근 2년의 시간 동안 김지은 씨가 싸워온 숱한 사건들을 그의 언어로 풀어낸 글이다. 대학에서 문학 전공을 했다던 그의 글은 나에게 부드럽게 읽혔다. 동시에 속상했다. 김지은 씨는 이 일을 겪어내는데 2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는데, 나는 불과 이틀 만에 이 책을 읽어버렸다. 그의 수려한 문장력 덕분이라 생각하고 있으나, 죄의식이 마음 한편에 자리 잡았다. 수많은 사건들을 담아낸 그의 글은 매우 덤덤했다. 짐작건대 그는 수없이 사건으로부터 자신을 떨어뜨리며 글을 썼을 것이다. 치열하게 거리를 두었을 그의 노력이 글에서 묻어 나왔다.
이 책은 안희정의 성폭력 사실을 고발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김지은 씨는 '차기 대권주자' 안희정의 권력 앞에 빠져나올 수 없는 깊은 무기력을 경험했다. 그는 김지은 씨에게 말했다. 수행비서는 봐도 못 본 것, 들어도 못 들은 것이라고. 김지은 씨는 대의를 위한 희생을 강요당했다. '대통령 만들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조직에서 그는 침묵해야 했다. 길고 긴 무기력의 무게를 견디다 김지은 씨는 그 동굴을 스스로 깨는 선택을 했다. 나는 JTBC 뉴스룸에서 피해 사실을 고발하게 된 과정을 서술한 부분을 보면서 전율이 돋았다. 김지은의 서사는 내내 '용기'였다. 그건 정말로 확실하다.
2018년 8월 14일, 안희정은 무죄판결을 받았다. 2019년 9월 9일 안희정이 3년 6개월 징역을 받기까지 1년의 세월 동안 김지은 씨는 '없는 사람인 듯' 지냈다. 안희정의 아내로부터 조작되는 2 차 가해와 숱한 루머들과 싸웠으며, 재판을 준비하느라 사건을 매일 떠올리며 살았다. 몸이 아파왔다고 했다. 그는 입원을 했고 약물을 복용했다. 3월에 쓴 그의 일기가 책에 실려있다. 마음이 덜컹 내려앉았다. 김지은 씨가 무엇을 잘 못 했는가. 김지은 씨는 왜 아파야 하는가.
그 아픔이 나의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아려왔다. 죄 없이 슬픔을 당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조금만 더 힘을 내요. 3월의 김지은 씨. 9월에는 당신이 승리해요."
책 속의 김지은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결정적으로 눈물이 났던 부분은 그의 가족에 대해 이야기한 부분이었다. 김지은 씨는 가족들과 떨어져 혼자 지내며 재판을 준비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사건을 마주하면서 힘에 부친 자신의 모습을 가족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으리라 짐작한다. 안희정에 대한 재판이 있던 날. 곧 안희정 유죄가 확정되는 날. 김지은 씨는 그의 부모로부터 이런 전화를 받았다.
김지은 씨는 그에게 응원을 보내온 사람들을 일일이 열거했다. 내가 기억해보더라도 안희정이 유죄 판결을 받기까지 대한민국 여성들의 연대는 끈끈했다. #metoo와 #withyou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이것밖에 없었다. 그러나 마음만은 함께였다. 최전방에 서서 피해자들을 돕는 사람들에게 존경과 경의를 표한다.
내 마음도 함께 뜨거워졌다. 결과를 알고 읽은 책이지만, 이 부분에서 얼마나 기쁘던지 가슴이 벅차올랐다. 3년 6개월도 너무 부족했다. 하지만 죄의 대가를 물을 수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기뻤다. 아직 우리나라가 이렇다. 안희정의 유죄판결보다 그 시간을 견뎌온 김지은 씨가 장했다. 버텨주었다는 사실이 참 기뻤다.
이 책을 읽으면서, 부지런히 읽고 써야 할 이유가 명확해졌다. 그간 마음이 힘든 일을 뉴스로 보면 외면해버리고 싶은 생각을 했다. 끔찍한 사건들을 보면 그저 눈을 감아버리고 싶었다. 연대한다고 말할 힘조차 없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는 생각이 바뀌었다. 김지은 씨는 독자들이 2년 동안의 그와 함께 할 수 있도록 마음을 열어줬다. 그의 언어는 나를 깨뜨리고 나를 울렸다. 절벽 끝에 매달린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들을 외면하는 건 인간으로서의 도리가 아니다. 마음이 아픈 순간이 계속될지라도 나는 계속해서 여성들의 서사에 귀를 기울이기로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다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