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 살의 너에게

나에게 그리고 너에게 보내는 편지

by 임용철

너는 또 하나의 나였는지 몰라. 그때 나도 쉰 살이었던 적이 있었거든.

햇빛이 투명해진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하늘을 향해 높이 솟아 올라가던 어느 가을날,

나는 아파트 단지를 산책하다가 1층 화단에 심겨 있는 한 그루의 감나무를 보았어.

나뭇가지에 주렁주렁 매달려 서로를 바라보는 감들을.

그러다 문득 내 안에 어떤 목소리가 내게 물었어.

'우린 언제부터 사랑을 잃어버렸을까?'

나는 내 안의 목소리에 나지막하게 대답했어.

'언제였을까?‘

나는 잠시 침묵했어.

그리고 내 안의 목소리가 들을 수 있게 대답했지.

‘그런데 처음부터 사랑이란 게 있긴 했던 걸까?’


쉰 살의 너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한번 가보고 싶다고 말했지.

나는 매일 아침 출근길에 순대 안의 순대 속처럼 꽉 막혀있는 고속도로를 걸어가는 끝없는 순례자들의 행렬을 마주해.

아무리 조바심 내며 새벽같이 일어나도 누군가는 늘 내 앞에 서서 걸어가고 있어. 나는 내 앞에 서서 걸어가는 순례자의 텅 빈 뒷모습을 응시하며 그렇게 내게 허락된 하루를 시작해.

가끔은 살기 위해 일하는 건지, 일하기 위해 사는 건지 도무지 모를 때면,

햇빛이 쏟아지는 플랫폼에 앉아 있던 눈부신 너를 떠올려.

쉰 살의 네가 살고 있는 기차역. 그곳은 지금도 가볍고 서늘한 바람이 종일 불어오겠지.


쉰 살의 너는 또 하나의 나였는지 몰라.

내가 살고 있는 동굴 안으로 비쳐 들어오는 너의 그림자를 보며

나는 스물세 살의 너를 떠올려.

순백의 드레스를 길게 늘어뜨리며 걷고 있는

너는 그 어느 날보다 행복한 꿈을 꾸고 있겠지.


쉰 살의 너는 또 하나의 나였는지 몰라.

너는 울음을 참고 있는 나의 등을 토닥이며 이렇게 말했지.

“어린이집에서 테디베어 곰 인형 하나를 놓고 다투던 한 아이가 있었대. 아이는 서로 30분씩 갖고 놀기로 친구와 약속했는데, 마음에 드는 곰 인형과 더 놀겠다고 친구에게 떼를 썼어. 하는 수 없이 선생님은 아이에게 약속을 지키지 않았으니, 벌로 방문밖에 나가 서 있으라고 말했어. 아이는 밖에 서서 교실 안에서 들려오는 친구들과 선생님의 즐거운 웃음소리를 부러워했어.

그러다 방안에서 누군가 지독한 방귀를 뀌었나 봐. 어떤 아이는 울고, 다른 아이는 ‘웩웩’ 소리를 지르며 울고 있는 친구들을 밀쳐댔지. 야단법석을 부리는 아이들을 달래느라 선생님의 한숨 소리가 들려올 정도였어. 한 아이만이 방안의 소란에서 벗어나 시원하고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있었어.”


쉰 살의 너는 사랑을 잃어버린 자리에도

종종 가볍고 서늘한 바람이 불어온다고 말했어.

그 바람을 기다리는 동안

나는

햇빛이 쏟아지는 플랫폼에 앉아 있던 눈부신 너의 존재가

지금

나에게 필요한 유일한 피난처였다는 사실을 떠올려.